나들이와 여행

[부산 나들이] F1963

그난이 2022. 12. 4. 01:16

걸어서 지나가 본 적이 있는 F1963을 왔다. 이사 준비를 도와준 친구에게 밥을 사고 커피를 사주러 왔다. 주차장이 넓어서 좋았다. 들어와서 서점을 구경했다. 새책도 팔고 중고 서적도 판다. 중간에 의자도 있어서 책 읽기에 알맞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책을 사서 봐야겠다. 우선 책을 좀 봐야겠다. 그나저나 새로운 직장에 가니 사무실 분들이 나는 솔로를 권하셨다. 아마도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봐야겠다. 결국 넷플릭스 멤버십을 다시 가입했다. 그동안 유행하는 작품은 잘 안 봤는데 대화의 소재를 위해 볼 필요가 생겼다. 어쩌면 좋은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서점에 와서 책은 보지 않고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

현대자동차 스튜디오에서는 지속 가능한 세상을 주제로 Habitat One라는 제목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구루의 안내를 받아 설명을 들으면서 전시를 관람했다. 한 달 정도 남은 이번 전시는 아무런 설명 없이 보면 심심하겠지만 설명을 들으니 그럴듯하고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서울에서 발베니 전시를 보며 느낀 좋은 감정을 여기서도 느꼈다. 왜 사람들이 전시를 찾아다니고 가이드를 따라다니는지 조금은 알 거 같다. 조용한 공간에서 작품 설명을 들으며 그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일종의 지식인 행세를 하는 유락이 있다.

테라로사 커피를 마시러 왔다. 아메리카노의 산미가 기분 좋았다. 아메리칸 피칸 파이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애초에 커피와 워낙 잘 어울리는 디저트이다 보니 괜찮았다. 다만 내 기대가 컸을 뿐이다. 옛 공장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여 조성한 F1963은 즐길거리가 많다. 대나무 산책길도 있고 갤러리도 있다. 서점이 있고 전시관과 도서관, 화원도 있다. 그리고 여유가 가득한 카페도 있다. 천장을 케이블로 장식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지속 가능한 세상이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의미 없어진 공간이 현시대의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모이도록 하는 매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부산 시민으로서의 마지막 밤이다. 10년에 가까운 부산살이를 마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참 설명하기 까다롭다. 고향은 대전이지만 부산에서 대학을 나와 지금도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대전 사람이 되겠지. 고향이 대전이고 대전에서 사는 토박이가 될 것이다. 일터가 대전이어서 부산을 떠나니 잘된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참 아쉽고 슬프다. 대전은 참 추웠다. 따뜻한 이 도시를 벗어난다는 것이 왜 이리도 아쉬울까. 부산으로 돌아오라는 친구의 말이 기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그러고 싶다. 그럴 일자리가 내게 주어진다면 말이다.

냉장고에 남은 맥주 한 캔을 비웠다. 술기운 때문일까. 내일이 마지막이라는 상황 때문일까. 침울하다. 이사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 많은 것들을 버렸다. 내가 가벼워지기 위해서 나는 버렸다. 차는 이미 꽉 찼다. 버려도 나에게 빈 공간이 없다. 나에게도 내가 있다. 나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도 지난 3개월은 나로 가득했다. 빨간 얼굴로 부산을 정리한다. 운전을 하다 느끼는 도로의 무질서함이 나름의 매력이다. 대화 소리는 늘 싸우는 거 같지만 정이 많다. 의리가 중요하고, 관계가 중요한 곳이다. 바다가 있고 산이 있어 기분에 따라 정처를 정할 수 있다. 기가 막힌 음식도 없고, 감격적인 풍경도 없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정겨운 해안 도시는 나의 성격과 너무 달라서 드센 곳이라고 느낀 적도 있다. 이제는 내가 헷갈린다. 나는 어디 출신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10년을 살아도 사투리를 할 줄 모르니 온전히 부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주저리를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밤. 들어줄 이가 없어 이렇게 글로 남긴다. 신입생 때 친구와 기숙사에서 떠들던 밤, MT를 가서 해변을 걷던 밤, 시험공부한다고 새벽에 편의점에서 치킨을 먹던 밤, 과방에서 둘러앉아 위스키를 마시던 밤, PC방에서 게임을 하며 막차가 끊기도록 놀던 밤, 데이트를 마치고 10킬로 가까운 거리를 걷던 밤, 입대를 앞둔 전날 밤, 친구의 집에서 신세를 지며 같이 게임을 하던 밤, 별이 많은 하늘을 보며 군생활을 회상하던 밤, 그리고 이사를 앞둔 오늘 밤. 즐거웠고 행복했다. 부산의 밤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