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글

회고(1) - 첫 기억

그난이 2024. 2. 13. 01:56

회고록을 쓰는 건 취업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 어쩌다 보니 취업을 준비하는 나이가 되어 자기소개서를 쓰려고 보면 내 삶이 무미건조했다고 느낀다.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소재를 찾기 위해 지나온 날을 샅샅이 뒤지면 하나씩 특별한 사건이 생각나고 좋은 이야깃거리를 찾게 된다. 큰형의 회고록을 보고 나의 어린 시절도 글로 남겨보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특별할 것 없는 과거에 대해 무어라 쓸지 고민했다. 무지의 장막처럼 깜깜한 세계에서 더듬다 보니 오돌토돌한 기억의 살갗을 찾았다. 출근을 앞둔 깜깜한 새벽인데 추억팔이한다고 여념이 없었다. 차라리 무라도 썰자는 심정으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다.

나는 세세한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주변인들을 서운하게 한 적도 많다. 아픈 상처는 그만큼 잊기 쉽지만, 남들에게 상처주기도 쉽다. 나의 변변찮은 기억력이 떠올리는 첫 기억은 무엇일까. 한참 동안 헤엄쳐서 도달한 것은 엄마를 잃어버린 날이다. 미취학 아동이었다. 5살쯤 되었을까. 엄마와 같이 시장에 갔다. 형들은 다 학교를 다녔고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는 건 나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다섯 살배기 아이가 집에 혼자 있을 수 없었다. 지금과 달리 시장이 주된 장보기 장소였던 90년대 말, 도마시장은 북적거렸다. 하늘은 화창했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나온 엄마는 버스정류장에 장본 거를 먼저 옮겨 놓으러 가셨다. 내가 일손을 돕기에는 너무 작았기에 내게 마트 앞에서 잠깐 가만히 기다리라고 하셨다. 나는 엄마가 사라지자 불안해졌다. 마시멜로를 기다리지 못하고 참을성이 부족한 아이였던 나는 엄마를 찾아 나섰다. 거인국에 떨어진 작은 아이였고 사람들의 다리를 피하며 지나갔다. 거인들의 그림자가 하늘을 덮어 시야는 어두웠고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누가 누구인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엄마를 영영 찾지 못할까 봐 두려워졌고 엉엉 울며 엄마를 불렀다.

그러자 한 가게 사장님이 포근한 미소를 띠며 나를 붙잡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다. 그래야 엄마가 나를 찾을 수 있다고 나를 진정시켰다. 그리고서는 나에게 질문을 쏟아내셨다. 집은 어디니. 집 전화번호는 아니. 집에 누가 계시니. 이내 어른들이 나를 둘러싸고 질문 공세를 이어갔다. 나는 질문에 답을 해야했고 울음을 그쳤다. "엄마랑 같이 시장에 왔어요", "형들은 다 학교에 가서 집에 아무도 없어요" 얼마쯤 지났을까 정말이지 엄마가 나를 찾아와서 꼬옥 안아줬다. 세상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가끔 마트나 놀이공원에서 아이를 찾는다거나 부모를 찾는다는 방송을 들으면 그날의 추억이 떠오른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과 지옥에서 구원받는 기분을 모두 느끼는 특별한 하루가 되겠구나. 어쩌면 부모를 잃어버린 기억을 나처럼 인생의 첫 기억으로 갖고 있는 사람이 제법 있을 거 같다. 첫 기억과 첫 회고.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