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
퇴근하고 집에 와서 빨래하고 저녁을 먹고 씻고 팩을 얼굴에 붙였다. 하루를 끝내기로 하였다.
비 내리는 날에 에어컨을 제습으로 틀어놓고 편안한 피아노 음악을 들으며 평소보다 빠르게 셔터를 내린다. 제습기와 선풍기가 건조대 위의 젖은 빨래를 재촉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담기 위해 누르는 셔터는 어려웠다. 피사체가 만족하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형에게 중고로 산 좋은 카메라는 고물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 두 가지 조명을 선물 받았다. 하나는 침대에서 쓰는 작은 무드등이고, 하나는 화장대에서 쓰는 조금 큼지막한 조명이다. 나에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장치다. 씻고 나와서 켜는 노란색 조명, 자기 전에 불을 끄고 침대를 바라볼 때 혼자 켜져 있는 무드등.
삶을 만족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취업이 급했던 나는 허겁지겁 준비해서 원하는 시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남들은 다 좋은 회사라고 치켜세워주고 나 역시도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일하였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점을 해소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이직을 준비했다. 여러 시도 끝에 도전한 두 회사에 동시에 합격했다. 하나를 선택했지만, 남겨둔 선택지를 두고 무의미한 고민을 이어왔다. 행복에 겨워야 했지만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우물쭈물하다가 가장 즐거울 수 있는 시간을 놓치는 격이다. 빠르게 눌러도 아쉬울 셔터를 너무 길게 누르면 결국 희미한 형상만 남는다.
내가 있는 공간에서 내가 놓은 것들이 주는 안정감. 내가 원하는 위치에서 빛나는 조명. 우연히 틀었는데 마음에 드는 음악. 옷장에 붙여 놓은 사진 속에 담긴 추억. 지워버린 것들에 느끼는 그리움. 다가올 것들에 대한 설렘. 형이 준 선물이 걸려있는 벽. 엄마와 전화로 떠는 20분. 내일 아침을 위해 삶아 둔 계란. 노조에서 사준 초밥 점심. 오늘 확인한 새 회사의 연봉. 열정적으로 본인의 가치관을 설파한 교수님.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은 변호사님. 기꺼이 태워다 준 동기. 나가는 차가 없을까 봐 전화로 확인한 동기. 별일 아니라며 연고를 처방해 준 의사. 퇴직금이 나왔다며 동기가 사준 커피. 누구든 초대해서 재울 수 있는 이불. 처음 가본 집 근처 트레이더스.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 행복했던 이전 직장의 기억. 기대되는 내일.
인생은 길고, 다 담으려면 카메라의 노출시간을 길게 가져야 한다. 하지만 셔터를 오래 누를수록 현상은 희미해지며 의미는 찾기 어렵다. 짧은 셔터로 많은 순간을 담자. 힘든 시간은 짧게, 행복한 순간은 다양하게. 나는 무한히 감사하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