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일 밤이 되면 금요일 밤을 기다린다. 주말이 언제 오나. 결국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던 금요일 오후 퇴근시간이 되었다. 5시에 나와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용산에 내려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식당 예약시간이 제법 남았다. 일단 씻자. 금요일 밤이니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호텔 근처에 있는 분위기 좋은 양식집 카토를 골랐다. 이름석자가 적힌 테이블 옆 창문에 비친 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보리색 빛이 방을 감싸고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음식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그 공간에서 마주 보며 얘기를 나누는 순간이 따뜻했다. 겨울이 왔구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구나. 요즘은 미국에서 메리크리스마스 대신에 해피홀리데이라는 말을 더 쓴다고 한다. 유색 인종이 많아지고 종교가 다양해져서 포괄적인 용어를 쓴다고 한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크리스마스이기에 쉬는 건데 그 의미마저 퇴색시키는 변화라고 생각한다. 차츰 그 정체성을 잃어가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게 뭐 중요한가. 결국 쉬는 게 중요한 거지.라고 넘기기에는 그 본질적인 맛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나다운 것을 잃으면 나는 매력 없는 사람이 되듯이 무엇이든 본질적인 그 가치를 잃어버리면 평범 그 이상의 것을 내기 어려운 게 아닐까. 나이를 먹어가며 보수화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창 시절에 세상의 많은 부조리를 깨고 이 사회를 바르게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내가 그것들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는 모르겠다. 나 하나 사람구실을 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인데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결국 나 하나 행실을 바르게 하자는 주의로 바뀐다. 그러다 보면 사회의 변화와 개혁의 목소리에 무덤덤해지고 번거롭게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라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렇고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화려한 식당이 자리한 건물의 지하에 뿌리서점이라는 작은 헌책방이 있었다. 처음에는 저 커튼을 쳐도 되는 건지 궁금했다. 커튼을 치고 보이는 풍경을 두고 들어가도 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갔다. 책이 가득한 헌책방이었다. 고급식당의 라이브 공연 소리가 바닥을 뚫고 두둥두둥 들려왔다. 마치 다른 세계로 차원 이동한 기분이었다. 아쉽게도 마음에 드는 책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 가게가 오래도록 남아있으면 좋겠다. 높은 마천루와 화려한 조명이 나를 옥죄어 올 때, 피신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호텔에서 일어나서 조식을 먹고 호텔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을 한다. 괜히 뿌듯하다. 적당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거리로 나와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그 카페에 남자 손님은 나와 다른 테이블의 한분 밖에 없었다. 여성분들에게 인기가 많은 카페였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버스를 타고 더현대 서울로 갔다. 재밌는 가게들이 많아 구경거리로 가득했다. 그 가운데 제일은 크리스마스빌리지였다. 웨이팅이 아주 길었고 낮에 걸어둔 웨이팅을 저녁 먹고 들어갔다. 백화점 한가운데에 크리스마스 마켓처럼 꾸며둔 것이 아이디어가 좋았다. 다만 하나의 사진명소에 불과해서 아쉬웠다. 작은 상점이 여럿 있었지만 사람들은 오로지 사진을 찍기 위해 들어갔고 각각이 좋은 사진 건지기에 바빴다. 상점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시각적으로 크리스마스에 대한 욕구를 충족했다. 유럽에서 갔던 여러 크리스마스 마켓이 떠올랐다. 언젠가 또 가야겠다. 자연스러운 장터가 주는 매력은 어마어마했다. 생동감이 있었으며 크리스마스를 오감으로 느끼는 장소였다. 여러 음식이 즐비하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리며 찬 공기와 함께 고소한 향기가 코로 들어왔다. 추위를 막기 위해 두꺼운 옷과 목도리로 온몸을 감싸고 늘어선 빨간 천막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게 곧 크리스마스다. 그렇게 따지고 나니 이곳도 성공적이구나. 잘 꾸며낸 공간이구나. 메리크리스마스.

한참을 기다려서 파이브가이즈 햄버거를 먹었다. 모든 야채와 소스를 넣는 것은 과했다. 양이 아주 많아서 감자튀김을 즐기기 어려웠다. 시그니쳐인 땅콩도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마드리드에서 혼자 여행할 때 먹은 파이브가이즈의 그 충격으로 기대하며 왔는데 아쉬웠다. 인간은 참 희소성에 약하다. 파이브가이즈가 여러 곳에 있는 마드리드에서는 사림아 아무도 없는 지점도 있었다. 그 평범한 것이 한국에 들어오니 문전성시로 발 디딜 틈이 없는 특별한 것으로 대접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햄버거 체인이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서 그런 대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인간은 이렇게도 새로운 것에 약하다. 익숙한 것에 무관심하다. 결국 맛보고 나면 뭐 특별할 거 없네. 하고 지나치기 마련이지만. 그 호기심을 이겨내지 못한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다. 오래 만난 연인을 떠나는 것이나, 오래된 친구에게 소홀해지는 것이나, 늘 함께한 가족에게 무관심한 것들도 새로 마주하는 것들에만 관심을 두다 보니 아끼고 지켜야 하는 게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결국 잃어버린다. 반대로 지키기에만 급급해서 결국 곪아버리는 관계도 있고 수많은 상처로 뒤덮이기도 하니 정답은 모르겠다. 파이브가이즈에 간다면 에브리씽 말고 올더웨이를 선택하는 건 정답이다.

호텔로 돌아왔다. 피곤했다. 뭐가 아쉬웠는지 모르겠지만 라면을 먹었다. 그리고 당신의 눈물을 보았다. 내가 서운하게 하였구나. 참고 참아온 당신이 털어놓은 속상함에 나는 등을 토닥였다. 내가 더 신경 쓰고 잘하겠다는 말로 눈물을 담았다. 밤하늘에 별은 빛나고 있었겠지만, 어두운 방 안에서 보이지 않았다. 따뜻한 물방울만 뺨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연인 간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맞출 수는 없지만 그래도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안다. 무엇보다 긴 시간 동안 무던히 삭혀왔던 그 마음이 안타까웠다. 참 착한 그대에게 더 잘하는 수밖에 없다. 굳세게 닫혀 있는 문을 열어주고 무너진 자존감을 세워준 그대에게 내가 조금은 차가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같이 맞이하는 겨울이기에 더 따뜻하겠노라 다짐한다.

마지막 날에는 안국으로 갔다. 피자가게에 웨이팅을 걸고 런던베이글뮤지엄에 웨이팅을 걸어두고 점심을 먹었다. 웨이팅이 없는 것이 어느 하나도 없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것을 해보려면 감내해야겠지. 계동 배렴 가옥을 들렀다. 'ㅁ'자형 한옥은 수묵화가 배렴 선생이 거쳐간 공간으로서 배렴선생의 작품을 책자로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지금은 미술인의 작업 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서울교육박물관을 들렀다. 독립운동가 김호선생의 특별전이 마련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천도복숭아를 통해 한국인 최초로 백만장자가 된 김호선생의 일대기를 알 수 있었다. 지나가다가 작은 갤러리도 구경했다.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서울에 사는 것도 참 매력 있겠구나 싶었다. 볼거리가 많고 문화생활의 폭이 넓다. 지방에 살면서 서울에 있는 여러 콘텐츠를 누리려면 숙소부터 구하니 비용이 상승하는데 서울에 살면 이런 것들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서울에 집을 구해서 살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블루보틀에서 커피를 마셨다. 자리가 많지 않았지만 큰 창 너머를 바라보는 좋은 자리였다. 커피도 괜찮았다. 떠들었다. 시간이 금방이었다. 서울에 와서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떠날 시간이었다. 이렇게 주말도 끝나갔다. 차츰차츰 기울어지는 해가 아쉬웠다. 238분의 대기 끝에 런던베이글뮤지엄에 들어갔다. 배가 불러서 포장으로 바꿨다. 핫하다고 해서 구매해 봤는데 특별한 것은 모르겠다. 내가 베이글을 제대로 먹어본 게 처음이라 비교군이 없다. 다른 베이글을 먹고는 다시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유행한다는 것을 경험해 봤다는 만족감도 있었다. 저녁을 먹고 호텔에서 짐을 찾고 다시 대전으로 내려왔다. 풍성했던 주말이 지나갔다. 우리 다음에는 어디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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