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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
남남
살결을 맞대고 누워 있었다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가족과 친구를 알고 지냈다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눴다 한들
이별 후에는 결국 남남이다
떠나면 남, 남으면 가족이다
매일 보던 친구, 동료였다고 하나
작별인사를 끝으로 멀어진다
삶의 터전을 옮겨 다니며
몇 년 간 많은 사람을 떠났다
가깝던 이를 벗어나며 살았다
떠나는 기분이 무척 홀가분했으나
무책임하게 떠돌아도
남겨진 내가 남겨둔,
녹지도 마르지도 않는
관계의 잔여물 여운
떠난 이를 떠올리는 것은
남은 이의 몫이다
여운의 향기를 마시는 것은
남은 이의 짐이다
선택
다른 세계선이 있으면 좋겠다.
현실에 발을 딛고 살면서 의미를 찾아가는 게 진리라지만, 찾아오는 미련을 돌려보낼 수 없다. 어땠을까. 내가 그때 달랐더라면. 어땠을까.
부산으로 진학한 선택. 행시에 발을 들인 선택. 대학원을 간 선택. 장교로 복무한 선택. 대전으로 취업한 선택. 이직을 한 선택. 울산으로 온 선택. 그 간에 있었던 만남과 헤어짐. 중요한 결정의 시기마다 만들었을 나의 여러 인생.
돌아보지 않는 선택이 없다. 내 앞에 주어진 일을 하다 보니 살아지는 것일 뿐이다. 때때로 돌아보고 후회하고 자책하며 읊조린다. 어땠을까. 그러면서 주변에는 선택했으면 그냥 돌아보지 말라고 조언한다. 참 모순적이다.
나는 돌리고 싶은 선택이 많은, 후회스러운 삶이다. 오늘 저녁으로 먹은 찌개가 매웠다. 청양고추를 두 개 넣은 그 선택마저도 후회가 된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미련한 나의 과거에 미련이 남는다.
3년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떠나고 3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몸무게는 속절없이 줄었다. 운이 좋게 취업은 했지만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 생긴 여유를 누린다는 핑계를 대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사실 친구가 자취방에서 우울하게 과거만 회상하며 시름에 빠진 나를 부추긴 결과였다.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고 정한 것은 그녀와 행복한 추억을 쌓았던 독일 만하임에서 여행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일정은 정하지 않았다. 정리를 하고 싶었다. 마무리를 위해서 처음으로 돌아갔다. 6년이 지나 돌아간 그곳은 변함이 없었다. 좋아했던 되너 집도 그대로였고, 기차역 앞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3년 가까이 지나서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땐 그랬다. 달라진 건 내 옆에 있던 사람이 떠났다는 것뿐이라 슬펐다.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30대의 하루는 20대와 많이 다르다. 일상이 간단해진 만큼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빠르게 흘러가는 나날 속에서 매일같이 과거를 추억했다. 가슴이 미어지는 속앓이였다. 못 마시는 술을 혼자 마시면서 1년 간 아무도 만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나의 다짐을 꾸짖었다. 나는 고집은 세지만 주변 사람의 말에 잘 동요하는 편이다. 그렇게 마음을 열고 보니 연애할 기회가 생겼다. 다만 깊게 만나지 못했다. 종종 20대의 연애를 돌아봤다. 여전히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연봉을 조금 올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평생 한 회사에만 다니는 게 어딘가 억울하기도 했다. 조건에 맞는 곳에 이직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호기심이 생겨 만나기 시작했지만 먼 거리가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따금씩 20대의 연애를 돌아봤다. 그때처럼 불타는 사랑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나의 마음을 흔들기도 했다. 무지개가 검다고 믿는 애정이 진정한 사랑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관계에 어려움이 있다는 건 애정이 있다는 뜻이다. 서로 힘을 합쳐 이겨내기로 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열정뿐인 20대의 연애를 지나 어른스러운 만남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이직을 했다. 가족과 애인, 주변 사람도 중요하지만 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고민이 많았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생각했다. 나는 성장욕구와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이라고 결론지었다. 금전적인 손해를 무릅쓰고 내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곳이라고 믿고 옮겼다. 선택의 결과는 먼 미래의 내가 알려주겠지. 옳은 선택은 없고, 의미 있는 선택이 되도록 하는 건 나에게 달려있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사람보다 아직은 내 삶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정착해서 뿌리내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결혼도 준비가 되어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아직은 나의 시간이 필요하다. 애인이 납득해 줄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논의할 시간이 오겠지. 지금은 배우느라 바쁘고, 방해 없이 반복되는 나의 일상이 좋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열렬히 사랑하던 그녀와 헤어진 지 꼬박 3년이 되었다. 고려 초기부터 돌아가신 부모님을 3년간 모시는 삼년상을 지냈다고 한다. 심오한 철학적 이유가 있고, 효도라고 믿으며 했겠지만, 떠난 이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며 지내고 보니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해서 그랬던 건 아닐까 싶다. 떠나는 그녀를 붙잡을 능력과 됨됨이가 되지 못한 과거의 나를 탓하기도 했다. 나를 두고 떠나는 그녀를 미워하기도 했다. 경쟁자가 되어 그녀를 뺏어간 녀석을 저주하기도 했다. 사랑이 떠나고 뾰족하게 남은 감정과 추억의 돌멩이는 세월과 무심함에 깎였다. 종종 잊고 지내다 보니 반짝이는 보석이 되었다. 나의 그리운 청춘. 나의 애달픈 첫사랑. 어린 시절 저녁이 되면 집에서 풍겨오던 밥 짓는 냄새처럼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고, 그저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으로서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내 인생의 보석이 이별 후 3년이 지나서야 완성되었다.
옆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잘하고 싶은 일이 있다. 나는 더 아름다운 보석을 만드는 중이다. 그렇게 여러 보석을 만들어 둥글게 꿰고 나면 나의 인생이 되겠지. 내가 만난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하다고 얘기하고 싶다. 이토록 인복이 좋을 수 없다고 믿는다. 당신이라는 우주를 마주한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행운이었음을 말하고 싶다.
특기
글을 쓰고 싶은데,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행복했던 주말이 가고 출근해서 자료를 읽고 공부한다. 나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활자를 보고 있자니 졸음이 온다. 사색에 잠기고 싶은데 어째서일까 마땅히 쓰고 싶은 글감이 없다.
나는 언어에 소질이 없다. 영어도 잘하지 못한다. 중국어도 배웠지만 기억나는 건 고등학교 중국어 시간에 배운 몇 마디뿐이다. 홍콩에 교환학생 가서 들은 중국어 수업은 나에게 단 하나의 언어적인 배움을 남기지 못했다. 한국어는 자격증 시험에서 1등을 해봤으니 잘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마저도 2년이 지나서 이제는 무효다.
나는 잘하는 게 뭘까. 일을 하면 그래도 곧잘 쓸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정작 나는 특기가 없다. 싫은 소리 하지 않고 실실 웃어넘기는 게 재주라면 나도 재주가 있긴 하다. 화를 잘 내지 않는다. 중학교 때 친구가 심술궂게 시비를 건 적이 있다. 내가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으니 화를 낼 때까지 옆에서 툭툭 쳤다. 언젠가. 화를 냈다. 지금 생각났다. 초등학생 이후로 친구에게 진심으로 화낸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구나. 이름과 얼굴마저 생각난다. 교실에서 나는 짜증을 냈고 결국 그 친구는 소원을 풀었다. 잘 지내고 있을까.
연애할 때는 왜 짜증을 낼까. 이제는 지나가는 많은 것들이 20대의 연애에서는 걸림돌이 되었다. 열린 마음으로 들었더라면, 나의 줏대가 있었더라면, 어른스러움을 지닌 성인이었더라면 어땠을까. 20대는 30대의 연애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이건 그저 내가 어리숙한 성인이었다는 방증이다. 그 어리숙함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부끄러울 때가 많다.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몇 가지 숫자가 있다. 기념일은 시계에서 마주하면서 더 잊지 못한다. 집 비밀번호, 학번과 군번. 평소에 생각도 안 하던 군번을 예비군 훈련 가서 떠올리면 바로 쓸 수 있다. 그리고 절대 외워지지 않는 숫자도 있다. 사주 볼 때 필요하다는 태어난 시각은 외우지 못한다. 나에게 중요한 숫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한 번 쓰고 나면 까먹는다. 학창 시절 외웠던 부모님의 주민등록번호는 이제 생각나지 않는다. 계좌번호도 신기하게 하나만 외울 수 있고 새로 만든 주거래은행의 계좌번호는 외워지지 않는다. 예전에 쓰던 비밀번호도 이제 생각나지 않는다. 잊었다. 잊지 않았다. 내 전공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큰일이다.
나는 오늘도 두서없이 글을 끄적였다. 내 특기다.
이사
대학생 때 매 학기마다 기숙사를 옮겨 다니며 이사했다. 편의점에서 버리는 박스를 재활용해서 짐을 싸고 옮기면 반나절에 끝났다. 기숙사에서도 머무를 수 없으면 친구집을 전전했다. 나를 받아준 고마운 친구들이 있었다. 그때도 내 짐은 박스 몇 개 남짓이었다. 군대 BOQ 1인실의 짐과 첫 회사 기숙사 1인실의 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나 혼자 할 수 있었고, 용달을 부르기에는 아까웠다. 이번에 이사할 때 보니 1톤 트럭을 가득 채웠다. 몇 개는 자리가 부족해서 차에 따로 실었다. 어느덧 내가 가진 잡동사니가 많아졌고 살림이 늘었다. 기억하고 싶어서 보관하는 기념품들은 쌓여만 간다.
비워내지 못한다. 옆에서 버려라 버려라 독촉해야 조금 내놓는다. 오랜만에 아버지께 연락을 받았다. 그동안 모아 오신 책과 책장을 나눔 하시겠단다. 집에 빼곡히 자리한 책과 파일철들. 내가 누굴 닮았겠나. 떠나라 떠나라 하면서 당신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켜켜이 쌓아 둔다. 집에 앉아 어머니가 키운 수박을 먹으며 아버지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 몇 년 만에 이렇게 마주했을까. 고독을 추구하지만 외로움을 견디시는구나. 이렇게 말씀이 많으셨던가. 떠나려는 아들들에게 차 한 잔 더해도 된다는 말씀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는 마음을 담아 기도를 해주셨다. 당신의 후회와 당부 속에서 묘한 따뜻함을 느꼈다.
다시 집으로부터 멀어진다. 어릴 적 나는 그저 집을 떠나고 싶었다. 사내가 집을 떠나려는 목적이 집이 싫어서라니 그 하찮음을 꾸짖으셨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났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기도가 조금 달랐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라는 당신의 평소 말씀에 아주 조금이라도 부합했나 보다. 고향을 떠나 가까웠던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고 새 직장에서 다른 일상을 시작하려니 설레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하지만 주변의 기대처럼 잘 적응해 내고 말 테다. 지난 세월 동안 무거워진 나의 이삿짐처럼, 내 선택의 무게감도 달라졌다. 적응해야만 한다.
회사 블라인드에서 내 퇴사로 왈가왈부하며 시끄러웠다. 누군가 이 기회를 틈타 부장님의 행실을 비난했다. 사람 때문에 나가는 거라며 보직자를 탓했다. 퇴직자와 보직자에 대한 배려 없이 그저 자기만의 시선으로 타인을 저격하는 조직 문화를 보며 안타까웠다. 적이 많은 유형이긴 하지만, 배울 점이 많았고 나로서는 감사한 어른이었다. 어쩌면 이와 같은 상황이 내가 나가는 원인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주류가 되려는 비주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주류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 나 역시 같은 길을 걷게 될 것 같다는 예상, 기관 안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는 성과,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회의.
사는 곳을 다른 데로 옮긴다. 일하는 곳을 다른 데로 옮긴다. 하는 일을 다른 것으로 바꾼다. 가는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삶의 양식을 다른 모습으로 바꾼다. 큰 변화로 닥쳐올 시련은 기꺼이 마주하고 담대히 넘어가기를 기도한다. 결국 잘 살 거라는 사소한 믿음이 있다. 행복이 일상 곳곳에 찾아올 거라고 기대하며 나의 과거에게 인사한다. 안녕.
궤도
퇴사
두 번째 퇴사. 3년에 가까운 방황이라는 표현도 들었으나, 나의 길을 찾아간다고 생각한다. 지금보다는 어려운 길이겠지만, 하다 보면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 궤도에 오르려면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이왕 버텨야 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버티고 싶어졌다. 백만 원이 넘는 월급을 포기하고, 연고가 없는 곳으로 옮긴다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20년 후를 생각해 봤을 때 내가 원하는 그림은 지금 있는 곳에서 그릴 수 없었다.
고향을 다시 떠난다. 돌아온 지 3년도 되지 않았다. 지금 회사로 옮기고 내 앞의 실장님을 보면서 10년, 부장님을 보면서 20년을 그리게 되었다. 그분들의 업무 능력과 인간성은 훌륭했지만, 나의 한계가 명확해 보였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먹고살기에 부족하지 않은 급여. 가족을 꾸리고 살기에 적당한 거주 여건. 이러한 가치도 소중하지만, 정부를 상대하고 기관의 성장에 나의 목표를 맞추고 산다는 것에서 서글픈 면을 보았다. 나의 성장은 찾기 어려웠다.
공부라는 것. 연구라는 것을 하면서 살아보려 한다.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부단히 공부하고 배워 나가면 언젠가 내게도 통찰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 작지만 어려운 꿈을 위해 나는 두 번째 퇴사를 한다. 통찰력이 있는 친절한 사람. 차분히 준비하고 기회를 살려서 한 번뿐인 삶을 보람 있게 살아봐야지. 그리고 이제는 퇴사라는 단어를 삼키면서 살겠노라 다짐한다. 묵묵히 버텨야 할 시간이 도래하였다.
새 삶
일렁이는 아지랑이 같은 감정. 떠나기로 결심했지만, 올바른 선택인지를 두고 한참을 씨름하는 번민. 정답이 있기는 할까.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방법뿐이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그려내야지.
습한 더위와 뜨거운 태양 아래 피어난 하얀 장미. 꽃을 피워내기까지 견뎌야 할 많은 시련. 내가 갖고 있던 것을 뒤로하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향해 가보려 한다. 이 땅 위에 핀 장미가 아름답다. 새 삶에 축복이 깃들기를.
아련
비 오는 날의 부산. 화창한 날의 부산. 새로 생긴 맛집. 한결같은 친구. 변함없는 나의 감정. 부산으로 회사를 옮길까 싶었지만, 결국 면접을 보러 가지 않았다. 급여도 업무도 바뀌지 않고 지역만 바꾼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많이 고민했다. 연고가 없는 곳에서 온다면 가치가 있겠지만, 대전과 부산은 둘 다 나의 고향이기에 무차별했다.
부산이 주는 아련함.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해는 뜨거웠지만 바람은 시원했다. 비를 맞으며 한 축구는 즐거웠다. 대전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나는 주말을 정리한다. 집에 가면 빨래를 해야지. 내일은 출근을 해야지. 아무 이유 없이 창밖 풍경을 보고 씩 웃어보자. 그리고 코로 숨을 천천히 내쉬어보자. 짧은 의식적 행동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아련함에 살짝 미소를 더하니 괜스레 소중한 추억이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