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로 가는 길

세 번째 프랑크푸르트행이다. 나를 기다리는 이는 없지만 간다. 처음에 올 때는 절박한 심정으로 내 연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당일에 비행기표를 구해서 밤에 출발했다. 미친 짓이었지만 후회하지 않고 인생에서 내린 몇 안 되는 잘한 결단이었다. 두 번째는 유럽을 함께 돌아다니기 위해, 둘 만의 안식처에서 행복을 누리기 위해 갔다. 한 달 넘게 계획을 세우며 어디에 우리의 순간을 남기고 올지 고민하고 실천했다.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기억이다. 이번에는 다르다. 독일에 혼자 오는 건 같지만 나를 맞이할 사람은 없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좋았던 시절의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을 하기도 하고, 유럽에서의 모든 기억이 함께한 기억이기에 나만의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작별이 필요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나의 일정과 동선에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지만, 이상한 데에서 고집이 정말 센 나는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가기로 했다. 누가 왜 독일을 거쳐가느냐 묻는다면 나는 쉽사리 말할 수 없지만 그리움에 사무쳐 가고, 그리움을 벗기 위해서 간다.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사랑했던 그대여, 나를 떠나 행복을 찾은 그대여 당신이 살았고 우리가 살았던 만하임에서 나 혼자 작별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독일에 도착 후

만하임역 정문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만하임 역까지 약 30분 정도 걸린다. 만하임에 도착하여 역사를 벗어날 때 보는 첫 장면이다. 나에게는 굉장히 뇌리에 강하게 박힌 장면이다. 처음 왔을 때 내가 떳떳하지 못해서 그런 건지 날씨가 그랬는지 아주 어두웠다. 우중충했고, 그림자가 드리운 역사였다. 오늘 가보니 밝아서 당황했다. 그리고 찬 바람에 더 당황했다. 참을만하다 싶었지만 걷다가 추워서 근처 가게에 들어가 배낭에 있는 옷을 꺼내 입었다. 역을 빠져나와서 1시 방향으로 가면 관광센터가 있다. 만하임 지도를 받아서 돌아다니면 좋다. 만하임은 사각형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지도를 보면 모든 원 안에 작은 구역이 사각형으로 구분되어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기준인가 싶었지만 지도를 보며 길을 찾다 보니 알파벳과 숫자로 표시한 방식이 편했다.


만하임에서 유명한 급수탑(Wasserturm)이다. 그 규모가 크고 급수탑 계단을 올라가서 시내를 구경하면 시야가 좋다. 높은 건물이 많지 않고 위치도 좋아서 가볼만하다. 다만 세상 어느 유적지나 마찬가지로 이 급수탑의 난간에도 각종 낙서가 적혀있다.


만하임의 중심에 있는 광장이다. Paradeplatz는 퍼레이드광장 또는 군대 사열식장이라는 의미이다. 광장 중앙에 있는 조각상은 때를 벗기고 불광을 내고 있었다. 뒤편으로 레베(REWE) 상점이 있다. 레베는 다른 마트에 비해서 가격이 높은 편이다.


수평으로 길고 균일하게 늘어선 안정감이 인상적인 만하임 바로크 궁전이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바로크 양식의 성이라고 한다. 어디가 궁전의 끝인가 싶은 가로로 긴 건축물과 넓은 광장이 특징이다. 현재는 만하임 대학교가 사용하고 있다.


성 근처에 있는 천주교 성당이다. 내외부 모두가 바로크 양식을 띠고 있다. 1760년에 완공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기존의 자재를 재활용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외부의 돔도 인상적이지만, 내부의 특색 있는 색감이 새롭다. 흰색 벽에 황금색과 녹색이 어우러져 있다. 내부에서 돔의 천장을 보면 눈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신의 감시인 듯, 나의 숨긴 마음까지 다 들춰낼 것 같다.


점심을 먹기 위해 Schwarzer Adler라는 식당을 들어갔다. 길을 걷다가 구글지도에서 괜찮아 보이는 식당이 있어서 들어갔다. '검은 독수리'라는 식당의 이름처럼 식당에 검은 독수리 문양이 걸려있으며 1733년부터라고 적혀있다. 정말인지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내부는 아늑하다. 화장실도 깔끔했다. 처음에는 슈니첼이 먹고 싶어서 들어갔는데 사장님이 오늘의 메뉴를 추천해서 설득되었다. 라들러를 작은 거 시켰다. 전식으로 카레 수프가 나온다. 카레향이 잔잔하고 짭짜름한 수프를 먹으며 추웠던 몸을 녹였다. 생각보다 너무 추웠다. 감기 걸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감자가 당연히 튀김인줄 알았는데 조금 당황했다. 음식 설명을 해주기는 했으나 나의 짧은 영어로 이해하지 못했다. 다 먹고나서 사장님께 여쭤보니 ochsenbrust(옥센 부어스트)라는 음식이라고 한다. 소의 가슴살을 이용했다. 소스는 느끼할 거라 생각했지만 틀렸다. 고추냉이를 넣은 듯 매콤했으며 새콤한 맛도 조금 있었다. 결국 양념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이국적이지만 맛있는 음식이었다. 도합 14.1유로 나왔다.


다음으로 Marktplatz(시장, 광장)으로 갔다. 다양한 상점이 들어서 있다. 패션거리와는 다른 분위기이다. 조금 더 생동감이 넘친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이곳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분위기가 아주 좋다. 울워스를 지나고 DHL을 지나고 네카어 강을 건넜다. 이제 관광센터에서 나눠준 지도에는 없는 지역이다. 나의 추억으로 가득 찬 곳을 찾아간다. 그전에 숙소에 가서 짐을 풀었다. 집을 떠난 지 30시간도 넘어서 샤워를 하고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길을 나섰다.


먼저 Herzogenried Park에 갔다. 유료 공원이다. 국제학생인지 물어봤으나 아니므로, 일반 성인은 3.5유로를 내고 들어가야한다. 들어가면 염소와 말을 비롯하여 여러 동물을 볼 수 있다. 잔디밭의 의자에 누워 느끼는 햇빛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평화로웠다. 미끄럼틀도 탔다. 장미공원이 있지만 철이 지나서 아쉬웠다. 곳곳에 잔디밭이 있는데 다시 생각해도 또 가고 싶다. 호수에는 오리와 물고기가 많다.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공원이다. 연간회원권도 있는 모양이다. 따스한 햇살을 느껴서 행복했다.


울맨백(Ulmenweg)으로 왔다. 이곳을 오기 위해 나는 독일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축구를 보기 위해서 유럽으로 와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있음에도 나는 이곳을 첫 여행지로 정했다. 하나도 바뀐 게 없다. 뒤편에 있는 분리수거장도 그대로 있고, 세탁실을 가는 지하문도 그대로다. 나를 마중 나오는 이는 없었다. 잠시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울맨백. 다시 봐서 반가워. 살면서 다시 만나는 날이 있을 줄 몰랐는데, 이렇게 오게 되다니. 바로 옆에 있는 체육관에서 배드민턴을 치곤 했는데, 크로스짐으로 바뀌었다. 헬스 기구가 가득했다. 이제는 트렌드가 바뀌었나 보다.


참새가 방앗간에 가듯 하루가 멀다 하고 갔던 네토(Netto)다. 정말이지 하나도 바뀐 게 없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양 옆으로 있는 과일과 채소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가격이 이상하리만큼 싼 빵이 잔뜩이다. 독일은 토마토를 꼭 채소랑 같이 둔다. 우리는 아닌거 같은데. 직진을 하면 유제품이 나온다. 오른쪽에 냉동식품이 있고 과자가 나오고 음료가 나오고 맥주도 나온다. 네토는 다른 마트에 비해서 음료의 종류가 적다. 하리보를 사려했는데, 본고장이라 그런지 작은 사이즈를 안 판다. 생수인 줄 알고 산 탄산수 한 병, 콜라 라이트 한 병, 불이 그려져 매울 거 같지만 맵지 않은 페퍼로니가 들어간 감자칩, 이탈리아산 청포도를 샀다. 과일은 리들(Lidl)이 맛있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만 네토와의 정을 봐서 샀다. 하지만 후회한다. 과일은 리들이다. 포도가 많이 시다.


네토 옆에 있는 스타되너(Star Döner&Pizza 2)에서 가장 싼 기본 되너를 시켰다. 4.5유로. 현금만 받는다. 처음으로 되너를 먹고 충격받은 곳이다. 여전히 맛이 좋았다. 되너의 매력은 바삭한 빵과 사우어크림, 그리고 케밥에 들어가는 고기에 있다. 무엇보다도 햄버거와 비슷하지만 처음부터 콜라가 생각나지는 않는다. 그만큼 야채가 많고 신선한 맛이 좋다. 마지막에 고기가 몰려있는 곳을 먹으면 짭짤하여 콜라가 딱 생각난다. 하지만 없어도 괜찮다. 피곤하다. 가자 숙소로.


오늘의 사진

후식으로 집에 와서 포도를 씻어 먹고, 감자칩과 콜라를 먹으며 저녁을 보낸다. 네토 전단지를 가져와서 펼쳤는데 재미없어서 덮었다. 그리고 글을 쓴다. 내일부터 이렇게 혼자 자는 호사를 누리지 못하므로 이렇게 여행기를 길게 쓸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만큼은 혼자서 하루를 정리하고 싶었다.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나는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 공항에서 열차를 타러 가는 길, 열차에서 보는 풍경, 만하임 역에서 출구를 찾아가는 지하통로, 역을 나오면 보이는 도로, 지도를 보지 않아도 찾을 수 있는 도시의 명소, 추억이 가득 찬 장소, 그리고 한 동안 나의 동네였던 울맨백, 나는 미련 덩어리이다. 이제는 아니고 싶다. 한 순간에 떨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별하기 위해서 굳이 여기까지 왔다. 그 동안 하루에 몇 번이고 속이 쓰렸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이 도시에 있는 동안에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공원에 누워 파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고 있으니 위로가 되었다. 우리의 도시였던 만하임을 나의 만하임으로 부르게 되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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