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기침을 하셨다. 평소와는 다른 기침이었다. 그래서 동네 보건소장님이 집에 오셨다. 한참을 계셨다. 나는 다문화멘토 학생과 지리산에 캠프를 갈 준비를 했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에 집안에 퍼진 할머니의 마른기침은 나에게 작별인사가 되었다. 내가 캠프에서 학생을 데리고 있을 때 집에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마음은 뒤숭숭했지만 내가 이 어린 학생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나중에 전화하셨다. 맡은 일을 다 해라. 새벽에 어둠 속에서 눈물을 훔치고 나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다.
어릴 때는 할머니가 무서웠다. 엄마가 할머니 때문에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손자들에게는 따뜻한 할머니였지만 엄마에게 모질게 하는 거 같아서 가끔 밉기도 했다. 시골집을 새로 지으면서 할머니와 계속 같이 살았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조금 생각이 깊어진 탓이었을까. 아니면 함께한 시간이 늘어나서 생기는 친밀감이었을까. 언제쯤이었을까. 할머니와 내가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순간이. 아마도 할머니의 발톱을 처음으로 깎아드린 날이 아니었을까. 주말 낮이었다. 햇살은 따뜻했다. 할머니가 발톱을 깎아달라고 하셨다. 살면서 이렇게 두껍고 강한 발톱은 처음이었다. 평생 내 발톱만 깎아오던 내가 타인의 발톱을 자세히 본 게 처음이었다. 발톱에서 할머니의 세월이 느껴졌다. '아,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거구나.' 발톱을 스스로 깎기 힘들어지는 날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고집이 세고 무서운 마귀할멈 같은 사람이 이리도 연약한 존재였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마녀가 하울의 집에 살면서 포근하고 지혜로운 할머니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등학생이 되어 매일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10시 10분에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오면 10시 30분쯤 되었다. 할머니의 방은 늘 불이 꺼져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할머니를 부르면 대부분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손자의 귀가를 확인하고 눈을 붙이셨다. 외출할 때는 "다녀오겠습니다.", 귀가하면 "다녀왔습니다." 인사해야 하는 규정이 있던 우리 집에서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할머니 방을 두드렸다. 점차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졌다. 공손하게 "할머니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말이 가벼워졌다. "할머니 저 왔어요", "할머니 막내 왔어", "할머니 안 주무시고 뭐 하셔요" "할머니 왜 안 자요" 사이는 가까워졌다. 그냥 가벼운 애교라도 부리고 싶었다. 그만큼 좋아졌다.
바람은 차갑지만 해는 따뜻했던 일요일 낮이었다. 할머니가 현관 밖 의자에 앉아서 쉬고 계셨다. 문득 할머니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할머니 옛날 얘기해 주세요.". 할머니는 학창 시절에 공부를 제법 잘했다고 했다. 그 시절 반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잘했지만 여자였기 때문에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게 한으로 남아 딸들을 대학까지 보내기로 다짐했다고 하셨다. 오랜만에 꺼낸 본인 얘기에 맑은 눈으로 나를 보며 신이 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 시절 소소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으셨다. 청자도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는 들을 수 없다. 까슬한 손등과 주름진 손바닥. 흰 머리카락. 할머니 방에서 느껴지던 따뜻한 공기.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추운 밤에 들어온 나의 손을 꼭 잡아주던 할머니. 늦둥이인 나는 여든이 넘은 할머니를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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