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왔다. 부산에 여행 온다는 게 참 이상하기도 하다. 그래도 여행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끼기로 했다. 익숙한 역사를 빠져나와 친구들이 있는 풋살장으로 택시를 타고 왔다. 기사님한테 충청도 스타일로 독촉했다. "기사님 도착시간이 언제로 나와요?", 친구들은 "쪼매 급한데 빨리 좀 가입시더"라고 해야 된다고 했지만. 대학에 처음 왔을 때 나는 말투로 놀림과 관심을 받았다. 신입생 때 대전에서 온 나와, 강원도에서 온 친구는 좋은 타깃이었다. 둘이 동지애를 가지고 친해진 것일까. 비바람을 맞으면서 축구를 해도 즐거웠다. 운동하고 먹는 치킨과 맥주는 또 감탄이 나왔다. 친구 집에 가서 씻고 누워서 축구 다큐를 보면서 떠들다가 잤다. 내일은 돼지국밥을 먹자. 대전에는 소국밥 집만 많아서 돼지국밥이 먹고 싶었다.

토요일은 혼자 자기로 했다. 해운대에 있는 토요코인에 짐을 맡기고 어디를 갈지 고민했다. 시립미술관을 가보자. 부산에 오래 있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마침 시립미술관은 공사중이라 전시를 하지 않고, 이우환공간만 무료로 개방하고 있었다. 들어가면 오디오 안내를 QR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이어폰으로 가이드를 따라서 작품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철판과 돌로 여러 작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현대미술이란 참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중간에 이우환 작가 다큐를 다 봤다. 혼자 왔으니 여유가 많았다. 다음 공간으로 가서 회화를 봤다. 천장이 뚫려 있어 자연광이 들어온 공간에 도화지에 찍힌 굵은 점. 작가는 이를 대화라는 제목으로 달았다. 묘했다. 웅장하기도 하고 여리기도 한 것이 나도 이 세상에 한 점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 한 점 흔적을 남기는 존재가 될 수는 있을까. 작품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좌우대칭이 완벽한 그 점이 참 영롱해 보였다. 마치 고양이 눈을 보고 있으면 빠져들 거 같은 깊은 공간감이 도화지 위에 그려진 점을 보면서 느꼈다.

단연 좋았던 것은 선으로부터(1974) 라는 작품이다. 작가는 점과 선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나 이 작품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그렸지만 어딘가 모르게 나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 선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살면서 점점 희미해지는 그런 것보다, 살면서 점점 채워가는 그런 것. 진한 점이 색을 잃어가며 하강하는 것이 아니라, 미약한 힘이 점차 굵은 점이 되어가며 굳세게 승천하는 그림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느낌이라는 것을 작품을 보며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 시간 넘는 관람을 마쳤다. 하늘에는 해가 쨍쨍했고, 나는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혼자 있으니 참 조용하구나.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 그림과 오랜 대화를 했나.

숙소가 4시부터 체크인이 가능한데, 1시간 정도가 남았다. 해운대에 있는 스누피 플레이스로 갔다. 조금은 색다른 카페에 가고 싶었다. 입구부터 스누피가 있고 안에는 스누피 굿즈와 마들렌과 조형물이 많았다. 스누피 덕후라면 다들 오겠구나 싶었다. 나는 사실 스누피가 어디서 온 강아지인지도 모른다. 그냥 캐릭터이겠거니. 2.5층에 올라가서 책을 읽었다. 오랜만에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문득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떠난 유럽이 생각났다. 그때 참 좋았는데.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고, 추억을 많이 쌓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일상에 치이다 보니 그랬던 시간이 까마득해졌다.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추억을 쌓아도 쉽게 잊히는데 왜 사람 간에 쌓은 기억은 이리도 강한지. 엉킨 실을 풀기 위해 손으로 이리저리 해도 소용이 없는 것 같다. 끊을 가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나 보다.

숙소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달렸다. 30분 동안 6킬로를 달리고 싶었지만 어제 두 시간 동안 축구를 한 탓인지 다리통증이 힘겨웠다. 해운대 해수욕장을 훑었다. 동백섬도 지났고, 누리마루APEC하우스도 구경했다. 안에는 달리 볼 게 없는데 1층으로 나오면 있는 해안가가 참 좋았다. 지금까지 동백섬 전망대에서만 내려다봤는데, 밑에서 보니 검은 바위를 치는 파도를 느낄 수 있었다. 이어폰 사이로 들어오는 파도소리를 듣기 위해 이어폰을 뺐다. 시원하다.

샤워를 하고 친구가 대접하는 오마카세를 먹었다. 예약하기 힘든 곳이라던데 정말이지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좌석 간 공간이 넓어서 좋았고 사장님이 필요한 설명만 해주셔서 좋았다. 1시간 30분 정도의 식사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배도 아주 부르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음식을 자주 먹으려면 얼마나 벌어야 할까. 식사를 대접해 준 친구에게 다시금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같이 아는 선배를 만나서 술을 기울였다. 1시가 넘는 시간. 서로가 하품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서야 헤어졌다.

토요코인 호텔은 처음 써봤다. 일본 체인 호텔답게 화장실에서 일본 숙소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공간에 낭비가 없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구성하였다. 샤워호스 길이도 딱 알맞았다. 정갈했다. 조식은 다 먹을 수 있지만 그만큼 사람이 붐볐고 음식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래도 빵에 잼과 버터를 발라서 커피와 먹었다. 체크아웃이 10시라는 게 참 아쉬웠다. 그래도 잠을 더 자기 위해 돈을 쓰기는 아까웠다.

집들이에 가기까지 시간이 남았고 스파랜드로 갔다. 4시간 이용권을 샀다. 목욕탕도 넓고 찜질방도 넓었다. 누울 곳이 많았고 족욕장도 있었다. 유성온천에서 가볼걸 그랬다. 발이 따뜻해지니 기분이 좋았다. 찜질방의 온도는 참 신기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그 미묘한 기온을 잘 유지한다. 사우나는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공간이 넓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이 많아지자 앉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안마의자로 몸을 풀고 릴랙스룸에 누워서 잠깐의 잠을 청했다. 요가룸에서 영상을 보며 매트필라테스를 즐겼다. 시간이 금방 지났다. 칫솔을 제외하고 씻을 때 필요한 물품을 갖추고 있는 점도 좋았다. 나가기 싫었다. 안마도 받아보고 싶었고 네일도 궁금했다. 혼자 하기에는 좀 궁상맞았고 시간이 없었다. 친구집으로 향했다.

낮술을 즐기다가. 밤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왔다. 집을 떠나 집으로 왔다. 익숙한 부산을 여행자의 입장에서 즐기고 싶어서 못해본 것들을 해봤다. 이별 노래를 들으며 긴 글을 쓴다. 나는 여행기를 왜 쓸까. 하나를 시작하면 어느 순간 이게 과업이 된다. 꾸준히 해야 한다는 강박이기도 하지만, 한 번 놓치면 완성되지 않는다는 걱정이기도 하다. 나의 부산을 기억하고 싶어서 쓴 여행기였다. 광안리해수욕장, 부산시민공원 등을 다녀와서 적던 나들이 후기가 쌓여서 유럽여행기도 썼고 국내여행기도 많이 남겼다. 나는 참 잘 까먹는다. 근데 가끔 내 글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 내 감정이 궁금해서. 내가 뭘 했는지 궁금해서. 친구들에게 이별을 토로하는 시간. 친구들은 놀리기 바빴다. 부산에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고, 또 대전에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늘 생각한다. 나는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늘 내가 부족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우주를 채울 듯한 감정이 모레보다 작아져서 헤어지게 하면서 왜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못할까. 그러면서 왜 또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할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가. 이사를 가는 것처럼. 예전에 살던 집을 가면 그때의 생활이 감정이 떠오르는 것. 결국 때가 되면 이사를 가야 하지만, 어느 하나 잊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나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우환 작가의 작품 '선으로부터'처럼. 결국 진하고 강한 점은 선이 되며 흐려진다. 그리고 다시 선을 그린다. 또 희미해진다. 영속적인 과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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