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내일로를 가려고 했다. 10년 전에 같이 내일로 기차여행을 떠났던 친구에게 오랜만에 고생하는 여행을 하자며 꼬셨다. 하지만 최근에 지점을 옮겨서 바빠 휴가를 쓸 수 없다고 했고 서울 근처에서 놀기로 했다. 아쉬운 건 아쉬운 대로, 새로운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같이 시간을 보낸다는 자체가 좋았다. 1년이 넘게 보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 각자의 삶이 바빠서 연락은 하지 않더라도 둘의 사정을 잘 아는 존재.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지만 같이 있는 게 불편하지 않은 사람. 삶의 가치관도 달라서 사는 방식도 달라졌지만 너는 너답게, 나는 나답게 살아가다가 오랜만에 만나서 같이 주말을 보냈다.

금요일에 퇴근하고 서울에서 후배와 함께 셋이서 고기를 먹었다. 용산에서 유명한 고깃집을 가려고 했는데 대기가 너무 길이서 옆에 있는 식당으로 옮겼다. 이마저도 딱 한자리 밖에 없었다. 그동안 못 들었던 각자의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자리를 옮겨서 이태원에서 나에게 과한 술을 마시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새벽 3시가 넘었을까. 이제는 피곤하다. 자러 가자.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출발했다. 날이 맑았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시덥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다 보면 을왕리에 금방 도착했다. 어디 가서 늦은 점심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유명한 곳을 가니 한참 기다려야 한다는 답만 들었다. 결국 계획에 없던 쌈밥을 먹었다. 먹다가 을왕리에 있는 아주 유명한 쌈밥집의 분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만족도가 높아졌다. 제대로 한 끼를 채웠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라는 게 이리도 약한 존재일까 싶었다. 나의 미각은 그저 식당의 유명세에 좌우되는 갈대에 불과하다니. 내 마음도 그러하니 내 모든 감각이 그러한 것일까.

근처에 큰 카페가 있어서 찾아갔다. 높은 곳에 자리해서 테라스에서 뻥 뚫린 경치를 볼 수 있었지만 건물 때문에 바다가 온전히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높은 곳에 카페를 지어서 그런지 커피가 하나에 7,500원이나 했다. 빵도 맛에 비해 비쌌다. 아무래도 카페까지 재료를 가지고 오는 운반비에서 많은 돈을 지출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건물을 비싸게 지어서 투자금을 회수하려면 음식값이 비싸야만 하겠지. 그래도 자리가 좋았다. 큰 통창이 주는 개방감 값인가 보다. 친구가 여자친구와 통화를 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지만 나와 이성에 대한 취향은 참 달랐다. 친구 사이에는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에서  흔하게  쓰이는 소재가 우리 사이에는 없었다.

숙소로 가서 누웠다. 어젯밤에 너무 늦게까지 놀아서 몸이 지쳐있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숙소가 해수욕장과 멀어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길이 어렵다며 구시렁구시렁 하셨다. 처음에 우리를 찾아오실 때부터 가는 길까지 그러셨다. 마치 승객이 잘못했다는 듯이 가스라이팅을 해서 기분이 언짢았다. 내가 건넨 친절이 불평으로 돌아올 때 사람은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 인사는 그래도 다정하게 하고 내렸다. 내 모토를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친절하자. 날씨는 친절하지 않았다. 바람이 살을 스치는 종이처럼 따가웠다. 해수욕장 모레 위를 얇은 모포 같은 것으로 덮고 있었다. 모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모래가 날리지 않아서 그나마 덜 따가웠다. 해수욕장 위에서는 폭죽을 터트리고 있었다. 세상에는 이런 게 많다. 지켜지지 않는 법규. 폭죽은 허가받지 않은 곳에서는 불법이고, 을왕리 해수욕장도 불법이지만 많은 가게에서 폭죽을 팔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폭죽에 불을 붙이고 그 튀는 불꽃 파편에 웃고 떠들었다. 행복하자면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지켜지지 않을 규칙을 만들어 놓은 게 잘못일까. 그렇다고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혀를 찰 수 있는 도덕적인 시민인가. 도덕적인 시민만이 타인의 잘못에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적어도 그래야 설득력을 가지긴 할 테다.

많은 식당의 종업원이 앞으로 나와 손님을 끌었다. 대부분 나이가 많으셨고, 나와 친구를 "아들~ 아들~" 하고 부르셨다. 호객 행위에 느끼는 묘한 불편함은 참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괜히 가고 싶어지지 않다. 그렇다고 해수욕장 앞의 횟집에서 호객 행위를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처럼,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것처럼 더 좋은 방향을 두고도 내가 안 하면 모든 것을 잃기 때문에 나도 같은 게임에 빠지고 만다. 더 큰 목소리로 외치고, 더 재치 있는 말을 꺼내며 사람을 부른다. 결국 유명한 트로트 가수를 닮았다는 말을 들으며 가게 들어갔다. 이 식당에 방문하는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말이지 않을까 싶었다. 각자의 주량에 따라 술을 마시고 뜨거운 매운탕에 혀를 데고 나오니 조금 추위가 가셨다. 지나가다 사격장에서 사격을 겨루고 숙소에서 먹을 간식을 사들고 소화를 시키며 걸었다. 무슨 이렇게 먼 곳에 숙소를 잡았냐는 푸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는 걸었다. 그 잔소리가 오히려 나를 즐겁게 했다.

밤에 잠에 들지 않았다. 너무 많이 먹어서 소화가 되지 않았다. 소화가 될 때까지 기다리다 보니 이제는 잡념에 사로잡혔다. 새벽 6시가 되었을까.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이 나를 괴롭혔는지 모르겠다. 유익한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스쳐간 모든 인연들이 생각나고,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지난밤의 진한 술까지 생각하고 나니 내 미래가 걱정되고 나의 인생을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나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지금의 나를 나는 만족하는가. 내가 원하는 변화는 무엇인가. 진짜 이루고 싶은 게 있기는 할까. 어느 하나 소화하지 못하는 생각들로 머리가 무거워졌다. 단순히 숙취라고 할 수는 없다. 어지러워진 생각을 한 데 묶어 던지고 싶었지만 달리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씩 잊어가다 보니 잠에 들었다. 고단함 밤이었다.

유명한 식당을 찾아갔다. 그렇게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50분가량 기다려야 했다. 근처에 카페가 있어서 찾아갔다. 밖은 성당 같이 생겼는데 안에는 정말 영험한 곳이었다. 최근에 가본 장소 중에 단연 압도적이었다. 물론 사람이 많고 북적였지만 이 공간이 주는 느낌은 참 좋았다. 스테인글라스 빛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면서 올라가는 계단을 둘러싼 거울이 빛을 더 화려하게 만들었다. 다음에 을왕리를 온다면 여기를 와야겠다. 뒤편에는 전시관도 마련되어 있지만 카페를 이용해야 입장할 수 있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리고 막국수를 먹었다. 서해에서 먹는 동해막국수. 동해 공기를 마시고 자란 친구가 맛집으로 인정했으니 맛집이 맞다. 배부르다. 집에 가자.

취향은 하나도 맞지 않은 플레이리스트의 노래를 들으며 인천을 빠져나왔다. 파란 하늘 위로 비행기가 날라갔다. 일요일에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나는 지난 주말이 얼마나 행복했나. 피곤을 부정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을 흔쾌히 동의한 친구가 고맙기도 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즐거움도 있었지만 나를 번뇌에 빠지게 했다는 점에서 불행한 여행이기도 하다. 고민거리는 여행을 마치고 누운 일요일 밤에도 끊이지 않았고, 월요일 아침의 나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내다 보니 기운이 다시 났고 나의 고민거리를 머리에 담아둘 여유가 없어졌다. 다행스러웠다. 다른 회사 면접을 보고 온 동기와 오랜만에 술 없이 떠들었다. 수면 시간은 한참 부족했지만 새벽 6시 전에 일어나서 출근한 아침의 기분이 좋았다. 참. 굴곡진 감정이다. 해수욕장에서 본 폭죽처럼 한 순간의 폭발음과 함께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는다. 그건 불법이니까. 해수욕장의 모래를 건드는 파도처럼 그저 때가 되면 오고 때가 되면 사라진다. 그게 자연이니까. 을왕리에서 나는 만조였고, 나는 다시 간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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