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크게 다투셨다. 큰 이모와 큰 이모부가 밤에 오셨고 엄마가 떠났다. 엄마는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슬펐지만 마음속으로는 떠나는 엄마를 응원했다. 힘이 약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탓하며 방에 웅크리고 있는데 아버지는 문을 벌컥 여시고 따라갈 거냐고 물어보셨다. 그때 아버지의 얼굴은 흉측한 마귀 같았다. 그렇게 아버지는 공포의 존재가 되었다.

차츰차츰 두 분이 다시 같이 살기로 마음먹으시면서 우리 가족은 아파트로 이사 갔다. 마당이 넓고 집 뒤에는 산이 있어 활동 반경이 넓었던 시골과는 달리 아파트에서는 11층 우리 집이 나의 놀이터였다. 그러니 아버지를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친해진 것일까. 아니면 그간에 소원해진 가족관계를 돌려보기 위한 아버지의 노력인지 모르겠다. 요즘 생각하면 나름 노력을 하신 거 같다.

아버지가 무서웠지만 나는 아버지와 노는 시간이 좋은 어린이기도 했다. 한 번은 같이 서점을 갔다. 책을 골라보라고 하셨고 나는 그리스로마신화 만화 1권을 골랐다. 아프로디테가 아름답게 등장하는 신이 눈에 선명하다. 아버지와 함께 서점을 간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나는 그리스로마신화 2권을 사달라 하지 못했고 1권만 계속 돌려봤다. 내가 조금은 더 컸을까. 나는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다.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새벽예배를 가시는데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사순절에 아버지를 따라 새벽예배를 갔다. 한 번은 새벽 예배를 마치고 나와서 교회 근처에 있는 콩나물해장국 집에서 밥을 먹었다. 아버지와 단 둘이 한 처음이자 마지막 외식이다. 내가 조금은 더 컸을까. 주말 낮에  아파트 앞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로 야구 글러브와 테니스 공을 들고 갔다. 아버지와 캐치볼을 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던지는 공이 번번이 아버지가 잡기 어려운 곳으로 날라 갔지만 싫은 티를 내지 않으셨다. 날씨도 좋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시간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시골로 들어갔고 고등학생이 되어 아버지 방에서 혼날 때가 아니면 둘만의 시간은 없었다. 취업을 하고 집에서 내 짐을 가지고 나오며 단둘이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제는 좋은 말로 헤어질까 싶었다. 어김없이 상처만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시를 써서 장관상을 받기도 했고 중학교에 진학하여 전교 1등을 하며 내가 모두의 기대를 받던 때가 있었다. 나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는 컸나 보다.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밤에 공부하다가 자꾸 내려와서 냉장고를 뒤적이는 내 모습을 보며 의구심을 품으셨다. 결국 원하는 수준의 대학도 아니었거니와 원하는 대학원에 진학하지도 않았고 한없이 꿈이 작아진 나를 보며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 집에서 짐을 찾아가는 나에게 그때 작은 행동들에서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나를 잘못 봤다고 하셨다. 그렇다. 어릴 적 기대와 달리 나는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릇이 작은 실망스러운 아들이 되었다.

20대 초반까지 있던 아버지와의 유대감은 점차 사라져서 이제는 정말 정서적으로 독립한 것은 아닐까 싶다. 이게 당신의 목표이셨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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