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삶의 원동력 중 하나이다. 여러 관계가 '사랑'이라고 분류되지만 정작 그게 사랑이 맞는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랑에 대한 공부는 관계에 대한 숙고이며 타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어쩌면 나는 그저 사랑한다는 감정에 충실했을 뿐 사랑이 무엇인지, 어떤 사랑이 건강한 것인지 공부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니 후회되는 부분이다. 나와 상대 간에 갈등을 원만히 해결했을지도 모르고 그 끝이 시끌벅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만 끝이 깔끔한 사랑이 있을까. 서로 같은 시간과 공간에 상대에 대한 호감이 0으로 수렴하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애정의 끈이 두껍고 그 경도가 높은 순간에는 내 감정을 공부할 필요가 없을 수 있다. 세상 모든 풍파도 사랑으로 견딜 수 있으면서 주변의 시선과 평판도 스쳐간 모기 소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끈이 얇아지고 느슨해져서 언제 끊길지도 모르는 순간을 위해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좋은 이별이란 끈을 끊어내는 과정이 깔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끊어진 이후에 얼마나 나다움을 유지하며 계속되는 삶을 건강하게 이어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연애를 하다 보면 '우리는 사랑일까?' 생각하는 순간이 온다. 그것은 사랑일 수도.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오래 함께해 온 시간의 무게일 수도 있고, 인생에 다시없는 귀인일 수도 있다. 모든 것에 정답은 없다. 그저. 어느 인간관계가 그렇듯이 사랑에도 신의가 필요할 뿐이다.

애인과 결혼하려고 아내를 버린 남자는 새 애인을 찾고 만다는 것 - 또 낙원을 찾아 카리브 해의 섬으로 날아간 사람은 불가피하게 햇빛과 바다에 실망하고는 그 실망을 가라앉히느라 마음속으로 또 다른 낙원을 찾는다는 것을

어릴 적에 삼국지를 참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 방학 숙제로 삼국지 정사와 연의를 비교하는 짧은 보고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 누군가가 요코야마 마쓰테루의 60권짜리 삼국지 만화책도 빌려줘서 집에 두고 여러 번 들여다봤다. 오랜만에 다시 삼국지를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 졌고 회사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어른이 되어 읽는 삼국지는 다르게 느껴질까. 어릴 때는 이게 마치 역사서 같았지만 이제 보니 역사소설이다.
혼란한 시대는 때가 되면 다가오기 마련이다. 태평성대를 그리 오래가기 어렵다. 그 혼돈은 곪아터진 내부에서 비롯되기 쉽다. 환관들의 간섭으로 총명했던 황제는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하고 흐릿한 정신으로 살아간다. 남아있는 충신의 조언조차 거슬리는 소음에 불과해진다. 살기 팍팍해진 민중은 미신이 위로한다. 새로운 종교는 사람을 현혹하고 새로운 세력이 되며 반란을 일으킨다. 나라가 어려워지면 어디선가 의로운 사람이 나타나서 극복해 낸다. 그럼 결국 문제는 해결이 되지만 부패한 나라가 바뀌지 못한다. 잠잠해지고, 다시 부패해지고 다시 혼란스러워지며 새로운 세력과 새로운 갈등이 생긴다. 새로운 영웅도 나타난다. 그 영웅들의 전쟁이 이제 곧 시작하려고 한다.
삼국지연의는 민족주의적인 소설이다. 한 나라의 혈통을 가진 유비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유비가 이끄는 촉나라의 팬이 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리고 그 품성을 닮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늘 공손하며, 상대를 편안하게 하면서도 상대는 어려운 구석을 찾고 매력을 가진 사람. 어른이 되어 다시 봐도 마찬가지다. 마치 더 멀리 보고 있는 것 같고, 깊은 생각을 가진 것 같은 그런 묘한 사람이 되고 싶다.
삼국지가 소설적인 면을 강하게 갖고 있다고 느낀 점은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려했으나 실패하고 도망치다가 아버지의 지인에게 잠시 의탁하여 하루 쉬려고 한 밤이다. 어르신은 시장에 가서 마실 것을 사 오겠다고 나갔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수배령이 내려진 조조는 어지러운 마음이 든다. 혹여나 이 어른이 나를 밀고하러 간 것은 아닐까. 의로움이 중요하며, 한실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서 이제껏 낙양에 머물던 그였지만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힘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느낄 시점이었다. 마침 밖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린다. '묶어 버릴까? 이 칼이 좋겠지?' 결국 나를 밀고했구나 싶은 조조는 나가서 온 가족을 멸살한다. 하지만 그들은 손님대접을 위해 돼지를 잡으려던 것이다. 진궁과 도망치던 조조는 술을 사서 오는 어르신을 만난다. 그냥 떠나려던 조조는 결국 그 어르신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은 채로 성공을 추구하던 조조가 본격적으로 난세의 간웅이 되기 위해 탈바꿈을 하는 순간이었다. 이 사람의 본질이 뒤바뀌었구나.
오래전 역사를 다룬 이 소설이 아직도 많은 게임 소재로 활용되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이유는 군상의 여러 면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살기 팍팍해진 현실에서 종교가 득세하고 우매한 민중이 종교에 의지하기 시작할 때 그 못난 종교가 설파하는 방식을 보고 있으면 2000년이 지난 지금과 다를 바가 있을까. 어쩌면 이런 교훈이 담겨 있기에 여전히 삼국지를 찾는 것은 아닐까.

요행 병이 나으면 자기들의 영험함 덕택이요, 낫지 않으면 믿음이 없거나 죄를 다 씻지 않았다 하여 병자의 탓으로 돌리니

인공지능이 발달한 미래에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인간다운 기계가 발명되고, 인간만큼 똑똑하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나온다면 인간의 존재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꿋꿋이 디지털로부터 멀어지려는 클론 선이와 가장 인간다운 휴머노이드인 철이. 다정한 아빠이자 연구자에서 인간의 영욕을 드러내는 최박사까지. 야망과 꿈이 있는 인간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술 혁신을 이뤄내고 그저 신선놀음만 하면 되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렇게 존재가치가 없어지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결국 남는 것은 거대한 인공지능과 그 복합체뿐. 인간은 허무하게 사라지고, 인간의 정신마저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 아니 사라짐을 알고, 끝을 아는 그 인지능력이야말로 인간인가. 조금은 시시하다 싶은 이야기가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인간다움의 작별인사는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철이의 작별처럼 쓸쓸한. 하지만 그 끝을 아는 인사.  그리고 끝을 알기에 느낄 수 있는 남은 시간에 대한 생동감. 어쩌면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는 레이스에서 지나온 길을 볼 수 있고, 종착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에 사랑하며, 다투고, 헤어지며, 후회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한 가족의 이야기가 끝날 때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왜일까. 인생은 왜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그럭저럭 살만한 삶이 비루하게 보이기도 하고, 내가 이루고자 했던 꿈이 어린 시절의 낭만에 불과하다 여기기도 한다. 젊고 시간이 많을 것 같은 나는 어느덧 신체적으로 노쇠하기 시작했으며 부모님은 에너지가 부족해져 걷기 불편해지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대에 태풍이 불어 국민이 다 같이 쓰러지기도 하고, 가족에 가혹한 태풍이 불어 불우한 가정을 꾸리고 한 개인에게도 그런 순간이 온다. 때로는 그 태풍이 오랜 세월에 걸쳐 굳힌 응어리를 깨끗하게 씻기도 한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때 묵은 응어리가 반짝반짝해졌을 뿐. 가족이란 그런 것인가. 가까워지는 것도 어렵고, 그렇다고 이별할 수 없는 사이다. 그리고 책임감이란 무엇일까. 불꽃 튀는 사랑도 무책임 앞에서는 환멸로 변질될 뿐이다. 어쩌면 나의 과거는 무책임 속에서 끝내온 관계의 연속은 아닐까. 어릴 적 내가 생각한 미래의 우리 가족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기대한 나의 서른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료카는 전처 교코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 아들 신고도 소중하다. 그러나 사랑을 지키기에는 부족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부모는 그래도 나를 사랑한다. 어느덧 엄마 도시코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 세월이 뭐 이런식일까. 아무리 과거를 후회한다고 한들 떠나간 교코를 잡을 수 없다. 교코도 안다. 료카와의 사랑이 진심이었음을. 그 시절 둘의 행복은 진실되었음을. 그렇다고 어린 신고를 책임지지 못하는 료카에게 돌아갈 수는 없다. 같이 대화하는 게 즐겁고 웃음이 절로 나오는 관계는 아니지만, 물질적 여유를 가져다줄 수 있는 후쿠즈미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모든 그렇다. 눈앞에 있을 때, 내 손에 있을 때 저거 해야 하는 법이다. 놓치고 나서 후회해 봤자. 저거 할 뿐이다.

한 번이라도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은, 더 이상 평온한 일상을 즐기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야성과 문명을 오가는 개, 벅의 이야기. 추운 알래스카 뚫고 가는 골드러시의 현장에 놓인 벅은 문명으로부터 멀어졌고 생존의 사투를 벌였으며 승리하기 위해 날이 갈수록 진화하였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고, 사랑을 만나기도 했으며, 다시 야성의 부름에 이끌리고야 만다. 소설 내내 벅은 그로 불린다. 사람인가 싶은 순간이 있다가도, 개가 맞지 싶은 때가 있기도 하다. 벅의 변화가 순식간에 이뤄지는 것만큼 서사의 속도도 빠르다. 문명이 모든 것을 삼키고, 황금이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뛰어넘을 때 결국 살아남은 것은 야성이었다. 판사의 동료에서 훌륭한 썰매 개에서 손턴의 사랑에서 야성의 지배자까지. 벅은 세월의 변화보다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그 방향의 세상의 변화와 맞지 않았다. 그른 방향인 것도 아니다. 내가 개 품종을 잘 알았다면 상상하면서 읽기 좋았을 것 같다.

그 공허감은 배고픔과 비슷했으나 벅은 아프고 또 아팠다. 어떤 음식으로도 채울 수 없는 아픔이었다.

 

드라마가 한창 인기있을 때 보지 않았다. 그리고 책을 열었다. 흡입력이 강했고 짧은 시간에 다 읽었다. 지극히도 한국적인 이야기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세대의 일생이었다. 그러면서 어느 곳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이방인의 고난이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이해되지 않는 인물이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게 사람의 선택이었다. 참으로 먹먹해지면서도 종종 흐뭇하게 바라보게 된다. 웃음꽃 하나 필 수 없는 환경 같으면서도 그 안에 작은 행복들이 찾아왔고 결국 살아냈다. 그래. 인생은 때때로 영광이 찾아노는 기구하고 지옥같은 굴레다. 굴레 속에서 작은 영광을 이뤄내고 얻어내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선자가 꿈속에서 다시 마주한 것은 젊음과 시작, 소망이었다. ... 위안이 되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들은 항상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약속 시간이 남아서 동네에 있는 무인 서점에서 무엇을 읽을까 고민을 하다가 집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책을 고를 때 제목에 집중하는 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장막 속에서 제목에 끌린다. 너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전화를 받는다. 기다리던 전화가 오기도 한다. 받기 싫은 업무 전화가 오기도 한다. 국제전화로 또는 모르는 번호로 보이스피싱 전화도 온다. 매주 안부를 확인하는 엄마의 전화가 온다. 약속 시간이 다되어 기다리는 나에게 어디인지 묻는 전화가 온다. 다양한 메시지를 가져오는 목소리에 나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당황한 역력을 드러내기도 하고, 퉁명스럽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전화의 달콤함. 헤어진 사람에게 받는 전화의 쓰라림. 많은 사람을 만나본 적은 없다. 하지만 헤어진 연인에게 전화를 한번쯤은 받아봤다. 그리고 그 끝은 너무 아팠다. 당황함에 감추지 못한 나의 옅은 목소리와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사이에 갈피를 잡지 못한 대답은 참으로 나를 초라하게 하거나 볼품없게 했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이런 걸까. 반면에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게 받는 전화는 또 어떠한가. 사람을 이렇게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오히려 기쁜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전화하는 순간에도 나를 가꾸고 목소리를 가다 듬는다. 기억은 파편이 되고 그 파편은 가슴에 박혀 있기도 하고, 도저히 꺼낼 수 없는 틈에 들어가 잊힌다. 그 위로 새살이 돋기도 하고, 청소하다가 틈 속에 숨은 파편에 찔리기도 한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도 식어서 돌아서고, 망부석이 되어 바라볼 것 같던 마음도 다른 이의 시선에 녹아버리는 사랑이라는 것은 참. 그저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구나. 너에게 전화가 왔다.

미지의 세계
                  원태연
내가 언제까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까요
이렇게

나는 문학적 감성을 가진 이과 인재를 부러워한다. 둘째 형이 그랬다. 공학박사로 일을 하고 있지만 책에 조예가 깊고 쓰는 글들이 멋졌다. 그래서 학위논문을 쓰며 붙인 지인들에게 쓰는 글을 몇 번이고 읽은 적이 있다. 이 친구도 그렇다. 단순히 똑똑하기보다 감각이 있는 사람이 쓰는 글이다. 이 친구의 몇 마디에 나는 유럽여행을 한 달간 다녀왔다. 그리고 그는 얼마 이후 발칸 반도를 다녀왔다. 

여행기를 잘 쓴다는 것은 여행을 하며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내는 능력에서 결정된다. 결국 많은 상상 끝에 고른 하나의 소재가 다수의 시선과 일치하면서도 조금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그 부분이 뛰어나다. 비슷한 관점인듯 하면서 남들은 불편할지도 모를 이야기를 거북하지 않게 하는 재주, 부러운 능력이다. 그렇다고 발칸 반도가 가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저자가 더 오래 여행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굳이 밟고 싶지 않은 땅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싶다. 그래서 요즘 여행유투버가 그리도 많은가 싶기도 하다. 

 

어느새 꿈보다 키가 커지고, 마음은 몸보다 작아진 어른이 지하철 창가에 비쳤다.

문이 중요한 국가와 무가 중요한 국가의 대결. 그 속에서 사는 사람과 말. 바람으로 풀 냄새가 나는 듯하고, 땅에서 배설물의 냄새가 올라오는 듯하다. 원초적인 시대의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과학이라고는 없지만, 사람이 있고 말이 있는 그 시대의 이야기다. 말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느껴지고, 말이 내는 땀이 살에 닿은 듯하다. 나 역시 발가벗고 초원 위를 달리며 무지의 역사에 빠진 기분이 든다. 살육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글이 참 매섭다. 하늘에 떠오른 달을 따라 걷고 있으면 문명의 이기가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그저 허허벌판 위에 올려둔 갓난아이와 다를 바 없어지겠구나 싶다. 풀과 돌을 덮은 피 비린내와 배설물의 지린내.

초의 기병들은 달리는 말 위에서 엉덩이를 들고 바람 속으로 똥오줌을 내질렀고, 목이 마르면 말 목에서 흐르는 말 땀을 핥아 먹었다.

인간의 자기가축화 역사를 보여준다. 개를 통해서, 여우를 통해서, 보노보를 통해서, 침팬지를 통해서, 공격성이 생존에 미친 영향과 친화성이 미친 영향을 비교한다. 호모사피엔스가 다른 사람 종을 제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친화력에서 찾는다. 강한 사람이 매력을 갖기도 하고, 강한 리더를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성격을 가진 사람이 더 오래 살아남았는가. 그건 인류의 생존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친화력으로 사회를 구축하고 거대한 힘을 가진 우리 인류이지만, 반대로 그 친화력은 타 집단에 대한 비인간화로 이어져서 끝없는 갈등과 다툼을 야기한다. 아직도 차별과 멸시는 도처에 만연하다. 언젠가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다 같이 발맞춰 살아가는 날이 왔으면 한다. 사무실 컴퓨터 배경화면에 띄워둔 나의 모토는 'Be Kind'이다. 책의 제목이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골랐는데 많은 가르침을 주는 책이었다. 센 사람이 되기 전에 친절한 사람이 되자. 그럴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지난 인류가 그렇게 생존해 왔듯이 나도 그렇게 생존해야지.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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