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행 버스를 탔다. 입대날이 떠올랐다. 무더운 늦여름이었지만 앞으로 다가올 운명이 싸늘해서였을까 더운 기억이 없다. 눈물의 이별을 하고 나는 3개월이 넘게 훈련을 받았다. 내 인생에서 아주 열심히 살았던 몇 안 되는 순간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아주 깊은 고립에 빠지기도 했다. 오로지 사랑뿐이던 시기였다. 훈련소에 들어가서 적응하기까지의 나를 지켜보던 친구는 내가 물에 빠져 젖어서 나온 풀이 죽은 강아지 같다고 했다. 그보다 잘 표현하기 어려울 거 같다. 3년이 더 지난 그때의 작별과 낯선 세계에 빠진 고통이 떠오르니 진주행 버스가 달갑지 않았다.

이 터미널은 정이 가지 않는다. 터미널 앞에는 롯데리아가 있었다. 그 사이에 다른 식당으로 바뀌어있었고 그 마저도 폐업을 했다. 안 좋은 기억을 물리치라는 듯이 날씨가 아주 좋았다. 맑고 높은 하늘이 좋은 기억을 담을 공간을 마련했다. 그나저나 횡단보도를 기다리며 느낀 점은 진주도 운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운전자의 태도가 공격적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상황에서 서로 경적을 울리는 게 부산에서도 낯선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저렇게 까지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조금 늦는다는 소식을 전해서 나는 걷기로 했다. 근처에 중앙시장이 있어서 갔다. 진주에서 가장 큰 시장이다. 2층에는 청년몰이 있고, 야시장 거리도 있다. 더 활성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시장은 북적이고 구경거리도 많고 무엇보다도 먹을 것이 많았다. 친구와 먹기로 한 메뉴는 정했지만 기다리는 사이에 다른 군것질거리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중간에 길을 잃기도 했다. 이상하게 시장에서는 길을 찾기 힘들다. 어릴 때 시장에서 엄마를 잃은 기억 때문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좋아하는 것은 나를 안심시킨 아주머니들과 마침내 엄마가 나를 찾은 기억 때문일까.

육회비빔밥으로 유명한 제일식당을 찾아갔다. 1시가 지났지만 1층에는 자리가 없어 2층으로 올라갔다. 육회비빔밥을 시키니 선지 해장국을 줬다. 선지가 신선하다는 느낌을 주는 해장국이었다. 육회비빔밥도 간이 세지 않고 야채의 맛이 살아나는 맛이었다. 많이 먹어보지 않았지만 지금껏 먹은 육회비빔밥 중에는 가장 맛있다. 그렇게 진주의 여행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와서 그런 것이겠지만, 육회비빔밥에게 공치사를 돌려본다.

후식을 먹으러 갔다. 진주에 사는 친구의 안내를 전적으로 따랐다. 수복빵집에서 찐빵과 팥빙수를 시켰다. 아주 맛있었다. 팥 양념에 계피향이 첨가되어 있었다. 팥빙수에도 계피 물이 들어갔다. 순식간에 먹었다. 팥이 들어간 음식 중에서 이렇게 만족한 적이 언제였던가. 나중에는 커피와 함께 먹고 싶었고 포장까지 했다. 주말에 가면 줄을 한참 서야 하는 맛집이라는데 평일에 점심도 지나서 가니 여유 있었다. 역시 남들 일할 때 노는 게 가장 좋다.

진주성을 갔다. 지역 주민이 아니면 입장료를 받는다. 2,000원을 내고 들어갔다. 성곽을 따라 걸어도 좋다. 단풍이 든 성 안이 조용하고 바람도 막아줘 산책하기 딱이다. 더 걸으니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입구를 지나 바로 오른쪽에 승자총통 체험관이 있다. VR 체험과 유사하게 승자총통의 모형을 들고 화면을 보며 왜군을 물리치는 게임을 한다. 이런 콘텐츠라면 성인도 즐겁게 할 수 있다. 4인이 함께 가능하며, 시간대별로 예약을 해야 한다. 가족이 함께해도 괜찮아 보였다. 체험을 마치면 조선을 지켜낸 공로로 공신교서를 받을 수 있고 친구와 성과를 비교도 할 수 있다. 재밌다.

처음부터 게임으로 관람을 시작했더니 나머지는 시시하게 다가왔다. 금방 지났다. 나와서 포장한 찐빵을 먹기 위해 카페를 찾아갔다. 커피를 마시며 몸을 데웠다. 진주에는 '하모'라는 캐릭터가 있다. 수달을 본떠서 만들었다는데, 아주 귀엽다. 지역 내 여러 카페에서 인형과 관련된 굿즈를 팔기도 한다. 진주시 차원에서 관광 활성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게 나름 효과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지역민이 사랑하고 타지인이 관심을 가지는 지역의 마스코트를 찾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데 진주는 해냈다.

저녁 전까지 나와 함께 있어주기 위해 친구는 콘텐츠를 고민했다. 진주 시내에서 20대 초반처럼 놀기로 했다. 오락실을 가서 같이 게임을 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동전 노래방을 갔다. 몇 년만의 노래방인가. 목이 아프도록 노래를 불렀다. 당구장을 갔다. 실력이 한참 못 미치는 나를 위해 포켓볼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졌다. 하지만 이렇게 노는 게 이제는 색다른 경험이 되었다. 시간 내준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저녁에는 다른 친구들을 만났다. 부산을 벗어나서 만난 적은 처음이다. 고향에 돌아와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모습이 멋있었다. 같은 것을 배우며 학교를 다녔지만 이렇게 사람마다 하는 일은 다르다. 각자의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멀리까지 왔다고 아웃백 스테이크에 데리고 왔다. 대접받는 기분을 한껏 느끼게 해 줬다. 직원의 친절한 서비스도 좋았다. 어느 하나 아쉬운 것이 없는 저녁이었다. 무엇보다도 식당을 찾아가기까지 길을 헤매서 시간이 걸렸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얘기하며 떠드는 그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

소화를 시키러 밤에 진주성을 다시 찾았다. 밤에는 입장권이 없었다. 물론 밤 10시 전에 퇴장해야 한다. 낮의 진주성도 아름답지만, 밤의 진주성도 아름답다. 성 자체가 아름다우면서 진주 시내를 바라보는 경치가 좋다. 성곽을 따라 걷고 있으면 없던 추억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버스를 탔다. 진주에 올 때 언짢았던 기분은 좋은 기억을 가득 담고 행복하게 돌아갔다. 같이 돌아온 친구와 집에 와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다시는 오지 않을 이 여유를 가득 느낀 하루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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