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한순간을 영원히 남길 수 있다. 남은 것은 하나의 장면이지만 남긴 것은 그 시간을 중심으로 찍은 하나의 영상이다. 머릿속 짤막한 영상들이 오랜 추억을 잊히지 않도록 한다. 계속 그 시간과 장소에 나를 머무르게 한다.

필름이 끊기고 나를 가누기 힘들 만큼 알코올을 넣는다. 식도를 통한 술은 나의 속을 게운다. 모든 것을 토해내고 기억하지 못할 주저리를 내뱉는다. 저장해둔 나의 사진을 지우듯, 내가 먹은 모든 것을 먹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괴롭고 아프게 한다. 지운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은 단순히 빼는 것이 아니었다.

사진은 나에게는 얹힌 음식이었다. 소화되지도 내뱉어지지도 않는 케케묵은 덩어리였다. 모든 픽셀 데이터를 지우고 나의 필름을 끊었다. 지난 나를 한심하게 보는 이도 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모습은 남겼다. 그 사진을 보고 있자면 기억의 파편이 피사체의 순간을 중심으로 뭉쳐 주변의 공기와 냄새를 떠오르게 하지만, 내가 있던 곳이다.

사진을 몽땅 지운 적이 있다. 그랬더니 내 기억에 싱크홀이 생긴 듯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에게 내 사진을 받으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경험을 했다. 과거의 나를 누군가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마주한 내가 반가웠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나를 나는 그리워했다.

헤어짐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불확실한 미래. 볼품없는 모습. 매력 없는 행동. 그 모든 결격사유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인은 자기애의 부족이었다. 술자리에서 친구가 얘기한 것을 며칠이 지난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심지어 나의 상대에게 이 얘기를 들었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떠올렸다.

그동안 남들에게 여러 다양한 이유를 꺼내며 나의 이별을 설명했다. 사진을 지운 시간을 되돌아보며 글을 쓰다가 깨달았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시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독  (0) 2023.02.02
오늘보다 나은 내일  (0) 2023.01.08
전역  (0) 2022.12.01
엄살  (0) 2022.11.21
커피 두 잔  (0) 2022.10.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