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에 라운지에 계속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자기들끼리 얘기하던 친구들은 자러 갔다. 나는 그냥 묵언수행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얼마 가지 않았다. 시차로 힘들어하는 호주 친구가 들어왔다. 아까 떠들던 친구들도 체크아웃을 하러 짐을 가지고 왔다. 나는 그들의 협조 덕분에 면접을 마무리했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아 줬다. 면접은 화상으로 보니 분위기를 전혀 알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면접관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무섭게 느껴진다. 실제로 표정이 밝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과야 두고 보면 될 일이다. 나는 취업 시장에 들어서면서 사기업 면접만 빼고 경험해볼 건 다 해봤다. 공기업 인적성, 공기업 면접, 사기업 인적성, 금융권 필기, 화상 면접, AI면접 등. 이렇게 따지니 사기업 인적성 열심히 칠걸 그랬나 싶다. 면접 경험이라도 해보게. 근데 나는 백수였던 적이 없는데 왜 백수라고 생각했을까. 사람 되게 초라해지게. 지난 일은 잊자. 결론적으로 나는 아주 피곤했다. 어제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오늘 새벽 5시에 누웠으니 피곤할 수밖에.

눈을 뜨니 12시가 넘었다. 어제 마트에서 사 온 팬케익을 데워 먹었다. 주방에 꿀 같은 귀한 게 있을까 기대를 했지만 없었다. 점심을 대충 먹고 밖으로 나갔다. 춥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은 건 아주 잠깐이었고 금방 비가 왔다. 그쳤다. 쏟아졌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영국에 와서 날씨 변덕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영국을 제대로 느끼지 않은 것이라 얘기해야지. 그 날씨의 변덕을 느끼며 켄싱턴 공원을 걸었다. 처음에는 이런 날씨를 가진 영국, 구체적으로는 런던을 다시 올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공원은 한적하고 기분이 좋았다. 호수를 중심으로 다양한 새들이 살았다. 주인을 따라 나온 강아지들은 청설모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나무 위로 올라간 청설모를 계속 쫓을 수는 없었다.

버킹엄 궁을 지났다. 그 이후에 민스터 사원도 지나고 민스터 궁과 빅벤을 지났지만 그 어느 관광지도 입장하지 않았다. 비용이 너무 세다. 이 가격이 지불 가능한 수준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입장할 것이다. 강을 건너면 런던의 관람차인 런던아이가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격을 검색했다. 5만 원이었다. 알아볼수록 납득하기 어려운 물가다. 그래서 다시 런던에 또 올 이유가 있을까 스스로 물었다.

가치는 있다. 오래된 건물과 새로지은 건물이 조화로운 거리가 멋지며 한 사거리를 지날 때마다 유명한 건물을 찾을 수 있다. 유서 깊은 도시답게 관광 콘텐츠가 많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도시 다운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교통이 편리하며 여행이 쉽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 구성원이 다양해서 동양인으로서의 이질감도 적다. 영국 음식이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맛있는 식당도 많고 즐길거리도 많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내가 가진 예산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가에 달려 있다. 즉 다음에 여윳돈이 충분할 때 올 만 하다. 그런 점에서 뉴욕이 궁금해졌다.

어제 만난 친구들이 런던에서 버러 마켓이 만족스러웠다고 추천했다. 그래서 오늘의 목적지는 이 시장이었고, 지나가면서 본 관광지는 그저 풍경에 불과했다. 나는 2시간가량을 걸었다. 어제 지하철을 기차역에서 호스텔에 올 때 한 번, 호스텔에서 경기장 왕복으로 두 번, 총 세 번을 탔는데 14파운드가 청구되었다. 오늘도 대중교통을 많이 탔다가는 지갑이 너무 얇아질 것 같기도 하고 시간도 있으니 걸었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다리에 힘이 풀렸고 남은 시간 동안 참고 걸었다.

시장에 들어서면 과일도 팔고 여러 음식도 판다. 밖에 식당에 비해서는 싼 편이다. 그리고 음식을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화장실도 깨끗하다. 괜찮은 곳이었다. 나는 버섯 리소토를 샀다. 버섯 맛이 강하고 짜지 않다. 엄청난 정도는 아니지만 만족스러웠다. 리소토의 쌀이 보리밥 같은 식감을 줘서 신기했다. 그리고 브라우니도 하나 사서 호스텔에 돌아와서 커피와 함께 먹었다.

오늘도 양말은 젖었다. 하지만 예측 가능했던 범위여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양말은 버렸다. 더 이상 빨래하면서 입을 필요가 없다. 호스텔로 돌아와 라운지에서 브라우니를 먹으며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했다. 그리고 인도 사람이 감자칩을 권해서 먹었는데 매웠다. 한국 과자와 비교해도 매운 편이었다. 맥주 안주로 딱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많아지기도 했고 나는 나와서 씻고 가방을 쌌다. 내일 아침에 런던을 떠나니 미리 준비를 했다. 피곤하다.

브라우니를 먹으며 오스트리아 친구와 얘기를 시작했다. 유쾌했다. 나는 씻고 글을 쓰고 다시 라운지로 갔다.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눴다. 내가 떠난 사이에 한국 사람이 왔고 그들이 새로운 한국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주인공처럼 등장을 하게 됐다. 결국 맥주와 과자를 사 와서 밤늦게까지 떠들었다. 1시가 되어서 누웠다. 오늘도 좋은 하루였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났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런던 여행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얻었을까. 런던을 충분히 느꼈을까. 나는 그저 사람을 만났다. 어제는 여행으로 만난 친구들을 다시 만나며 인연을 이어갔고, 오늘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장소는 평범한 호스텔의 라운지였지만, 여행을 떠났다는 나의 이 상황이 나의 태도를 바꿨다. 내가 나의 익숙한 공간으로부터 벗어난 것도 여행의 핵심 요소지만, 내가 지금 여행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결국 다시 영국으로 여행하러 온다면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때도 나는 일상으로부터 떠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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