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르 광장

새벽에 잠을 잤더니 피곤이 쌓였다. 더군다나 체크아웃이 10시여서 급하게 나가야 했다. 가방을 메고 무작정 나왔다. 걷다 보니 마요르 광장이 나왔다. 정열의 빨간색이 광장을 가득 채운다. 친구는 이 풍경을 보고 러시아에 갔냐고 했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 아래에는 식당과 가게가 많이 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아주 많았다. 거리 어디를 가든 식당은 붐볐다. 그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하늘은 어둑했다. 비라도 쏟아질 듯이.

Rastro de Madrid

가방을 메고 다니기 어려웠으므로 호스텔에 연락해서 짐을 맡길 수 있는지 물었다. 가능하다고 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 시장이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유명한 시장이라고 한다. 상설 시장인 줄 알았으나 일요일에만 열린다는 사실을 저녁에 알았다. 미리 알았더라면 뭐라도 하나 집었을 텐데 아쉬웠다. 구제 옷이 특히나 많이 팔리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 곳을 온 것은 경기장을 제외하면 처음이다. 괜스레 에코백의 안전을 살피게 된다. 그동안 소매치기 걱정 없는 여행을 하긴 했다.

Royal Basilica of Saint Francis the Great

무작정 걷다 보니 톨레도 문(Toledo Gate)을 지났다. 개선문과 유사한 형상이다. 교차로에서 경찰이 운전면허증을 검사하고 있었다. 주말 낮에 하는 이유가 궁금하긴 하다. 그리고 한 성당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돔에 그려진 그림이 특징인 1700년대에 지어진 성당이다. 무엇보다도 오늘은 일요일이고 시간은 11시를 지날 쯤이었다. 성당을 구경하고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미사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나는 스페인에서 미사를 드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경험이다. 그래서 굳이 나가지 않았다. 중앙에 큰 돔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돔으로 이루어진 이 성당에서 울리는 음악은 더욱 마음을 경건하게 하였다.

점점 배가 고파졌다. 지나다 보니 산 미겔 시장이 나왔다. 보케리아 시장의 실내 버전이다. 다만 과일음료는 없고 타파스를 파는 곳이 많으며 사람들은 간단한 점심을 즐기고 있었다. 사람이 아주 많았다. 먹고 싶은 음식은 많았지만, 보케리아에서의 경험이 나를 만류했다. 덕분에 나는 시장을 지나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향한 추위의 공격은 더 매서워졌다. 다들 경량 패딩 입고 있는데 반팔에 바람막이만 걸친 나는 한없이 나약할 수밖에 없었다. 비까지 쏟아졌다.

그러다가 일본 라멘집을 찾았다. 따뜻한 국물이라면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구글 평점 4.6인데, 리뷰 수가 8,000개나 되는 유명한 곳이었다. 식사를 마칠 때가 되니 사람이 꽉 찼다. 라멘도 맛이 좋았다. 일본에서 먹을 때 보다 덜 짰으며, 매운 양념을 달라고 하면 준다. 조금씩 넣어 먹으니 입에 잘 맞았다. 한식은 피해서 나만의 기준을 충족했지만, 익숙한 음식을 찾아 먹어서 왠지 아쉬웠다. 그러나 내 목을 통과하는 따뜻한 국물이 내 온도를 높였다. 원초적인 본능은 그 어떤 신념과 가치를 초월한다.

meseo de jamon

호스텔에 체크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들어와서 커피를 마시며 밀린 글을 썼다. 라운지가 잘 되어 있었다.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니 룸메이트가 있어서 인사했다. 내 위층 침대에 사는 사람이다. 아르헨티나 친구가 생겼다. 이번에도 형이다. 여하튼 부족한 영어로 대화하는 재미가 있었다. 조카를 위한 선물을 사러 가는 그와 동행하기로 했다. 결국 밤 12시가 되도록 우리는 아무것도 사고 오지 않았다. 즐거운 산책이었다. 나는 하몽 샌드위치를 시도했다. 2.8유로의 단출한 이 샌드위치가 썩 나쁘지 않았다. 하몽을 맛볼 수 있는 쉬운 방법이다.

그리고 저녁을 함께 했다. 제대로 된 스페인식을 먹는다. 스페인어가 모국어인 아르헨티나 친구 덕분에 작은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부모님은 이탈리아 사람인데 이탈리아어가 모국어라고 해야 할까, 아르헨티나 사람이니 아르헨티나의 공용어인 스페인어가 모국어일까. 조금은 애매하다. 여하튼 나의 스페인어 선생님이 되어줬다. 식당에서 토르티야와 생선 튀김을 시켰다. 그리고 작은 맥주 한 잔을 의미하는 까냐도 곁들였다. 바게트 위에 토르티야를 얹어 먹으면 으깬 감자 샐러드와 에그 스크램블을 올려 먹는 맛이다. 훌륭한 한 끼였다. 서로의 나라 얘기를 하고 들으며 새로운 문화를 알아가고 사람을 알아가는 재미가 좋았다.

호스텔에 돌아오니 이미 어두워진 방에서 취침을 준비하기 위해 아주 조심스럽고 빠르게 움직이고 누웠다. 예상치 못한 추위와 비가 외로움을 더 했다. 여행이 너무 길다는 생각도 들었다. 계속해서 불확실한 여행을 하다 보니 내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특히나 몸이 좋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다. 스트레스에 약한 편이다. 하지만 잠에 들 때는 풍족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변덕이 심한가. 낮에도 호스텔에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켜 글을 쓰기 시작하니 힘을 얻기 시작했다. 내가 만약 룸메이트를 보고 대화하기 위해서 먼저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오늘 하루는 완전히 달라졌을 거다. 침대 위에서 추위에 움츠러든 애벌레가 되었겠지. 이렇게나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떤 선택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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