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서른한 살. 생일 전날 밤 9시까지 야근을 하고, 밤 10시에 축구를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일을 맞이했다. 주말에 축구해서 생긴 물집은 오늘로 더 단단해졌다. 비가 왔다. 베란다에 널어둔 수건은 습기를 먹어 꿉꿉한 냄새를 풍겨서 다시 빨래를 돌렸다. 작년 이맘때 이직 준비한다고 바빴는데, 지금은... 새로운 회사, 새로운 집, 새로운 침대, 새로운 텔레비전을 두고 다시 새로운 곳을 찾는다.

생일을 카카오톡 프로필에 띄우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누군가 나의 생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 부담스럽다. 설명하기 어려운 버릇이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띠동갑 선배는 정말이고 어려웠다. 만날 일도 없었지만, 동아리에서 선후배 만남을 하면 지나치듯 인사하고 다시는 볼 일이 없었다. 다가가는 것도 힘든 존재였다. 어느덧 나도 그런 나이가 되었다. 할 줄 아는 게 없는 건 그들과 마찬가지인데.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세상에 온 듯하다. 내가 신입생일 때 생일에도 비가 왔다. 시험기간이었다. 당시 단과대학 건물을 새로 짓고 있었고, 경영관에 과방이 있던 시절, 수업이 늦게 끝났고 비가 와서 하늘은 빠르게 어두워졌지만, 설렘이 있던 시간. 12년이 지났지만, 수업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가던 순간만큼은 기억난다.

식탁 위에 놓인 꽃이 집을 향긋하게 만든다. 고요하다. 냉장고 소리, 공기청정기 소리, 가끔 울리는 보일러 소리. 새벽 1시를 향해가는 시간. 부질없는 아침 전화영어와 출근이 나를 기다린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연락을 했다. 참 공감하기 힘든 사이인데, 이번에 아버지가 주신 메일에는 공감이 되는 말이 있었다. "통곡할 골방". 하루하루 밥값을 하며 사는 삶에는 말못한 사정들이 있고, 고달픈 하루가 있고, 괴로운 순간이 있으며 그만두고 싶은 감정들이 몰아치는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뎌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들이 수 없이 많다. 그대에게는 통곡할 골방이 있는가. 아버지의 물음에는, 아버지의 경험이 담겨있다고 느꼈다. 자식들을 키우며, 부모를 봉양하며 아버지에게도 통곡할 골방은 있었을까. 나에게는 골방이 있나. 다들 그렇게 견디며 사는구나.

전 회사에서는 내가 일을 잘한다고 느꼈다. 주어진 일을 빠르게 처리했고, 근무시간을 알맞게 조절할 수 있었다. 지금 회사에서는 일을 못한다고 느낀다. 내게 주어진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데 쌓이는 일이 더 많다. 수당도 없는 근무시간만 넘쳐난다. 선배들도 그렇게 하고 있는걸 보면 어딘가 잘못된 구석이 있다. 누구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 부서는 원래 그런 곳이야. 앞으로 5년은 지나야 여유가 찾아오려나. 내가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게 무엇인지 돌아본다. 오래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시간이 지나면 능숙하게 처리하는 날이 오겠지만, 그게 나의 능력에 도움이 되는가. 즐거움으로 가득해야 할 생일날에 고민만 깊어간다. 생각만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 잠을 청하고 내일의 나는 일을 해야지. 

어머니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야겠다. 오늘 내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평안한 하루가 되길. 그런 생일이 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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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끝난다. 3월이 되면 정기인사가 이뤄지고 사람들이 바뀐다. 신입이 들어올 때까지 일이 몰릴 예정이다. 번번이 경고와 당부를 하신다. 일이 바쁠 것이다. 일을 더 줄 것이다. 주어진 일이라면 결국 해내야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게 월급쟁이 아니겠는가. 이런 일상을 바라고 회사를 옮긴 건 아니지만, 빠른 승진을 바라고 옮긴 것은 맞으니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지.

요즘 일기도 쓰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고 어딘가 모르게 나사가 빠진 거 같다. 그렇다고 정신 차리지 못하게 일이 바빴는가. 그렇지도 않다. 습관적인 무기력증으로 나를 통제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건강하지 않다. 회사를 옮기고 살이 5킬로 쪘다. 열심히 운동해서 낮춘 체지방률은 다시 높아졌고, 자신 있던 체력도 나약해졌다. 아담해서 좋았던 집은 큰 집으로 옮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나태와 불행.

열심히 살고 싶다는 생각.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 이 모든 것을 가로막는 게으름. 반성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퇴근 전의 계획, 자기 전의 후회. 오늘도 가져온 서류는 열어보지 않았고, 목표한 운동시간은 채우지 못했다. 나태한 자아가 깨어나면 좋겠다. 작년부터 한쪽 코가 계속 막혀서 불편했지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 병원을 찾으니 약간의 비염과 코 안 쪽이 휘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병원에서 준 약을 먹었는데 큰 변화가 없는 걸 보면 비염을 고친다고 낫는 일은 아닌 모양이다. 숨을 잘 못 쉬니 수면의 질이 떨어지고 하루 종일 피곤하고 나태해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산을 내려와서 생긴 증상인가. 나는 촌동네가 체질인 사람일까.

아침에 전화영어를 하면 횡설수설한다. 자연스럽게 모닝콜이 되었다. 전 회사에서는 내 돈을 일부 내고 시작했다. 돈을 이미 내서 그런지 수업을 빼먹는 게 그렇게 아깝지 않았다. 지금은 이수하지 않으면 오히려 월급에서 차감을 한다. 월급명세서에 찍힌 돈이 줄어드는 건 상상도 하기 싫어서 꿋꿋이 전화를 받는다. 이런 게 행동경제학의 한 갈래 아닐까. 이미 지불한 돈에 대해서는 그 가치가 낮게 인식되는 것.

오랜만에 글을 쓴다. 지나치게 나에게 무관심했던 모양이다. 3월이 되면 사무실을 벗어나서도 나태하지 않은 내가 되어보자. 나태여. 구태여 내게 머물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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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몸이 청하는 잠을 방해하는 여러 고민
그러다 옛 사진들을 꺼내서 들여다본다.
그립다. 마르고 볼품없던 그 시절.
가진 것이 없어 모든 걸 내어도 초라하던 나날.
그래도 행복해 보인다. 사진 속의 내가.

그다지 바뀔 것이 없는 나이가 되었다.
단순해진 일상.
안정적인 삶을 염원하던 20대 후반의 나는
지금을 바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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