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서 바티칸의 타임랩스 영상이 나왔다. 내가 저기를 가봤구나. 머리 깊숙이 숨어 있던 바티칸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돌로 지은 멋진 건물과 다리. 바티칸의 원형 광장에 늘어선 긴 줄. 강렬했던 조각상. 행복했던 순간이 이토록 희미해졌다는 사실이 슬프다. 나의 로마여. 나의 바티칸.
사진도 없으니 꺼져가는 바티칸의 불빛을 되살릴 초가 없다. 내 육신이 바티칸 땅을 밟아봤다는 나의 육성만이 남는다. 허풍과 다르지 않다.

더 나은 연애를 하겠노라고 스무 살부터 스물두 살까지의 사진을 지운 적이 있다. 뒤적일 기록이 없으니 기억도 사라졌다. 나보다 어린 친구를 본다면 살아온 시간을 남겨두라고 말할 거다. 숨기고 싶은 과거일지언정 그것 또한 나이기에 남겨두라. 지나고 보니 아쉽다.

나의 스무 살을 기억하고 싶다.
나의 바티칸을 돌아보고 싶다.
나의 스무 살은 친구들이 떠드는 말로 작은 조각을 되찾는다.
나의 바티칸은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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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말을 쏟아내도 부족했다.
내 속을 너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네 싫증은 신의 저주와 같았다.
웃음소리는 천사의 합창이었다.

신이시여. 나의 사랑이시어.
어찌 신의를 저버리시나이까.
신의 뜻이니라.
지옥구덩이에 빠뜨리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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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를 매고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데 한 청년이 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카메라의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아름다운 노을이 하늘을 물들였다. 얕고 넓은 강을 주황빛으로 덮고 하늘은 검고 푸르스름한 물결이 쳤다. 바람도 풍경처럼 따뜻하고 차갑기를 반복했다. 버거웠던 아침의 출근길은 찬란한 퇴근길을 위한 준비였구나. 이어폰을 노래를 바꿔 J-POP을 틀었다. 가사는 모르지만 제법 일본 영화 속 직장인이 된 느낌이 났다. 행복을 정의한다는 건 어렵지만, 짧고 소소한 시간에 나는 행복을 느꼈다. 일이 버거울 때도 있고, 앞날을 고민하거나 걱정하는 일이 빈번히 찾아오지만 미소 짓는 짧은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저 멀리 빛나는 초승달이 서서히 차올라 그믐달이 되며 사라지는 지루한 반복 속에 남기고 싶은 장면이 많다. 오늘 노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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